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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씨(劉氏)의 연원

2006/07/30 21:15

유씨(劉氏)의 연원

劉氏 大觀 (유씨 대관)

劉字를 "卯金刀" 통상(通常) 묘금도유 라고 새김한다. 그러나 사전(辭典)에서는 예외적으로 성유(姓也), 이길유(剋也), 쇠잔할유(衰也), 죽일유(殺也)등으로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

劉字로 성(姓)을 쓰이게 된 유래(由來)

통지씨족약(通志氏族略)에 의하면 우리가 劉字로 성을 쓰이게 된 것은 중국고대(中國古代)의 제요도당대(帝堯陶唐代)의 다음으로 劉字를 성으로 쓰게 되었다.

원래는 지명(地名)을 나타내는 글자로서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정(鄭)나라 읍명(邑名)을 지칭하였다가 그후에도 주(周)나라에서는 대부채지(大夫采地) 또는 하남성언사(河南省偃師)의 읍명(邑名)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고 춘추지리고(春秋地理考)는 밝히고 있다.

그후 하(夏)나라 14세 공갑왕(孔甲王)으로부터 유루(劉累)라는 분에게 "어룡"氏로 사성(賜姓)하였고 상(商)나라 때에는 시위(豕韋)氏로 주나라 때에는 당두(唐杜)氏로 각각성(姓)을 고쳐부르다가 한고(漢高)께서 한제국(漢帝國)을 창건(創建)하시고 황제(皇帝)에 등극(登極)하시면서 劉字를 우리 姓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 劉氏는 한제국(漢帝國)의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 劉邦 선조의 위대한 혈통(血統)을 이어받은 훌륭한 후손(後孫)인 것이다.

劉氏 본원(本源)의 시조(始祖) : 漢太上皇(한태상황)

문헌상(文獻上)으로 보면 유구(悠久)한 반만년전(半萬年前) 중국고대 하왕조말엽(夏王朝末葉)에 累(루)라는 분이 있었는데 이분이 바로 유씨본원(劉氏本源)의 시조이시다.

이 분의 아드님이 明(명)이시고 손자에 遠(원), 증손에 陽(양)이시며 고손자에 獲(획)이시고 6세손에 淸(청), 7세손에 仁, 8세손에 諱가 (단)이신데 字는 執嘉(집가)이시며 부인은 諱含始(휘함시)이시며 昭靈夫人(소령부인)이시다.

이분이 곧 漢太上皇(한태상황)이시며 우리 劉氏의 1세손이시다. 이분의 슬하에 四子를 두셨는데 長子에 伯(백), 次子에 仲(중), 三子에 季(계), 四子에 交(교)이신데 三子이신 季(계) 되시는 분이 바로 漢高祖(한고조)이시다.

漢高祖(한고조) 諱(휘) 邦(방)의 약사(略史)

한고조이신 劉邦께서는 기원전 256년에 주(奏)나라 페풍읍 중량리 지금의 강소성에서 휘 (단) 태공(太公)의 三男으로 태어나셨으며 字는 季(계)라 하였다.

公이 세상에 태어나시기 전에 公의 모친 昭靈夫人(소령부인)은 우연히 집 주원(周園)에 있는 큰 연못가에 나왔다가 자신도 모르게 혼곤히 잠이 들고 말았다. 그런데 꿈에 선인(仙人)이 내려와서 모친의 품속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깜짝 놀라 눈을 뜨자 갑자기 온천지가 캄캄하게 변하고 천둥소리가 요란하더니 돌연 눈앞에 이무기(용이 되려다 못되고 물속에 산다는 큰구렁이) 한 마리가 몸둥이를 사리고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로 公의 모친은 태기가 있어 劉邦 즉 漢高祖(한고조)를 낳으셨다. 公은 용봉(龍鳳)과 같은 기상을 지니고 있었으며 기골이 장대하시고 특히 수염이 아름다운 비범한 인물이셨다.

성품은 활달하시고 정확한 판단력과 주저하지 않는 결단력 그리고 도량이 넓으셔서 남을 도와 주기를 좋아하셨다. (優人喜施:우인희시, 仁而寬:인이관, 意豁如也:의활여야) 또 하나 기이한 것은 公의 왼쪽 장단지에 까만점이 77개나 있었다. 公은 일찌기 지방시험에 합격하시어 사상(泗上)의 정장(亭長)이 되셨는데 公의 주위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들고 또 따랐다.

특히 당대의 유명한 관상가단부(觀相家單父) 현사람인 呂文(여문)은 공의 비상한 용모에 감탄하여 늘 입버릇처럼 "公은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이다. 앞으로 무상(無上)한 영광을 누릴 큰 인물이다" 라고 말하였다.

여문은 公을 사위로 삼고자 公을 자기집으로 초대하여 주연을 베푼자리에서 "劉公은 장차 크게 또 귀히 될 사람이니 부디 몸조심 하기 바라오 장성한 딸을 맡기겠으니 사양하지 말라" 고 하자 공은 정중하게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여문의 간절한 청을 더 거역할 수 없어 마침내 승낙하고 말았다.

다음날 公은 패현령(沛縣令)의 명을 받고 복역수를 압송하여 여산릉(驪山陵) 공사장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압송 도중에 도주하는 자들이 많아 해질무렵에 풍서에 도착한 公은 죄수들에게 "당신들은 한 번 여산으로 가면 그 중역을 벗어날 길이 막연할것이니 제각기 자기의 살길을 찾도록 하라" 고 선언하였다.

그중 십여명이 公을 따라 가겠다고 하여 그들과 함께 公의 일행이 망탄산 어느 오솔길로 접어 들었을 때 갑자기 길이 희미해 졌다. 이상히 여긴 公은 영리한 사람 하나를 보내 길을 알아 오도록 하였더니 잠시 후 그사람이 허둥지둥 달려와서 "지금 열자가 넘는 큰 백사(白蛇)가 앞길을 가로막고 있으니 딴 길을 택해야겠습니다" 라고 고하는 것이었다.

이에 公은 "장사가 가는길에 감히 무엇이 무서울게 있단 말인가" 라고 외치면서 큰칼을 뽑아들고 옷자락을 휘날리며 달려가서 열자가 넘는 백사를 내리쳐 단칼에 두동강이를 내고 앞장서서 걸어갔다. 뒤에 따라온 일행은 두동강난 큰뱀을 쳐다보며 저마다 "참으로 용감한 대장부이시다" 라고 감탄하면서 저분을 끝까지 따르리라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기이한 일이 생겼다. 큰뱀을 베인곳에 밤마다 백발이 성한 노파가 나타나서 두동강이가 된 큰 뱀의 시체를 안고 구슬프게 울부짖는 것이다. 이 광경을 보며 그곳을 지나던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그 노파에게 "그 징그러운 동물을 제거했는데 무엇 때문에 그처럼 슬퍼하시오." 라고 하자 그 노파는 여전히 울먹이면서 "모르는 소리 말아라 나의 아들은 白帝子(이다음 진나라를 말함)인데 마침 백사로 화신하여 길에 나왔다가 赤帝子(이다음 한나라를 말함)의 칼에 맞아 죽었으니 억울하고 또 의지할 곳이 없어 이처럼 통곡하는 거다" 라고 대답하였다.

이말을 들은 일행은 미친 노파라고 단정하고 지팡이를 들어 떠밀려는 순간 그노파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한편 거대한 백사를 단칼에 죽였다는 소문이 퍼지자 비범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여 公의 곁으로 모여드는 장정들이 수백명에 이르러 점차 그 세력이 확충되어 갔다.

이 무렵 패현의 관리로 簫何(소하)와 曺參(조참)이라는 두 장수가 진(秦)나라를 쳐부수기로 협의하고 또 한편으로는 망탄산에 망명중인 公을 불러 들여 함께 의거하기로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公은 즉시 수백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패현으로 달려갔다. 이때 公의 세력은 구름같이 모여드는 장정들로 더욱 강대해져 갔다.

그러나 현령은 公의 세력이 강대해지는 것을 보고 자기의 큰 실수로 후회한 나머지 소하와 조참을 불러들여 문책하기를 "너희들이 허울좋은 구실로 나를 속여 劉邦을 끌어들여 패현을 빼앗으려 하고 있으니 그 죄를 용서할 수 없다" 하면서 그들의 목을 베라고 명령한 다음 劉邦의 일행은 한놈도 성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엄명하였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의 청에 의하여 다행히 소하와 조참에 대한 참수령은 취소되었으나 공의 일행은 성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을 때 소하와 조참 두 장수가 수십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公을 찾아와서 "劉公은 지금 세력이 강성하니 기회에 무능한 현령을 처단하고 패현을 취한 다음 이를 근거로 하여 흩어져 있는 지사(志士)들을 규합 의거를 일으킨다면 향후천하(向後天下)를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간절히 청하였다.

이말을 들은 公은 침착한 어조로 "두 사람이 과연대의(果然大義)를 주장할 뜻이 있다면 당장 일어나서 무능한 현령을 처단하고 새로이 현명한 인물을 뽑아 현령의 자리에 앉히면 자연히 민심이 수습되어 대사를 이룰 수 있을 것이요" 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소하와 조참은 다시 公에게 "지금 패현의 백성들이 모두 불안감에 사로잡혔으니 화살 끝에 효유문(曉諭文)을 매어 성안에 쏘아 보내면 저절로 내란이 일어나 사흘안에 패현을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재차 간청하여 공은 그들의 말을 따르기로 하고 수십통의 효유문을 써서 성안으로 쏘아 보냈다.

그 효유문에는 "우리는 진(秦)나라의 학정에 시달려 온지 벌써 오래이다. 그러므로 나 劉邦은 삼가 공의(公義)에 따라 우선 현명한 현령부터 다시 선출하여 이 현의 백성들의 살길을 되찾게 한다음 점차 의병을 모집하여 각처의 호걸들과 함께 잔학무도한 진나라를 쳐부수고자 한다. 지금 너희들이 이 점을 감안하여 천명에 순응한다면안전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아니할 경우에는 성이 함락되는 날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라고 써 있었다.

이 효유문을 본 패현의 백성들은 서로 모여 의논하기를 "지금 劉邦의 세력은 강성하고 소하와 조참까지 劉邦을 따르기로 하였으니 패현이 함락되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한시바삐 궐기하여 劉邦을 따르는 것이 우리의 살길이다" 라고 하면서 수많은 군중들이 관아로 달려가서 무능한 현령을 처단한 다음 성문을 활짝 열고 환성을 지르며 公을 맞아 들였다.

구름같이 모여든 백성들은 정중히 현령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公은 이를 완강히 거절하고 받아 들이지 아니 하였다가 열화같은 온 백성들의 간절한 성화에 견디지 못한 公은 이를 수락하고 패현(沛縣)의 현령이 되었다. 수많은 군중들의 환호와 축하속에 성위에는 붉은 색의 깃발이 수없이 꽂아 그 위세를 과시하였다. 과연 赤帝子(적제자)의 아들이라고 한 그 노파의 말이 꼭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패현의 현령이 되신 공은 삼천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함양을 쳐들어가 진(秦)의 왕자 영을 폐위시키고 기원전 206년에 漢나라의 왕이 되었다.

漢王이 되신 公은 漢나라 사람으로 마치 孫武子(손무자)처럼 적을 요리하여 승리를거두는 병법과 법려처럼 큰 공을 세운 뒤에도 선뜻 물어서는 묘법을 구사하는 지략을 지닌 사람으로 이름은 張良(장량)이며 字는 子房(자방)을 사부로 삼고 신출귀몰한 병법을 구사하는 한신장군(韓信將軍)을 대원수(大元帥)로 하여 장주(丈洲)를 평정시켜 30만의 대군을 얻는 큰 성과를 거두므로써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르듯 당당하였다.

이어 여세를 몰아 조(趙)나라 20만대군을 격파하고 조왕(趙王)을 사로잡는 등 대전공을 세웠으며 이와같은 승승장구의 대세로 물밀 듯이 연(燕)나라와 제(齊)나라 그리고 오(吳)나라 등을 피하방울 흘리지 않고 항복(降伏)을 받았던 것이다.

한편 진(秦)나라를 폐망시키고 초(楚)를 세운 다음 진(秦)의 구세력을 대표해 오던 項羽(항우)와 진(秦)의 학정에 시달린 반감으로 인하여 규합된 신흥세력을 대표하는 한(漢)나라 왕이신 劉邦과의 처절했던 5년안에 걸친 이른바 한초전(漢楚戰)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바이며 이 유명한 초한전사(楚漢戰史)는 지금도 청사(靑史)에 길이 빛나고 있는 것이다.

천하무적의 역발산(力拔山) 항우도 결국에는 漢王이신 劉邦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던 것은 항우의 힘이 역발산이기는 하나 성질이 과격하고도 교활하여 백성들의 생활이나 고충 따위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잔인무도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항복한 군사들까지 모조리 생매장한 일이 있을 뿐 아니라 공격하는 곳마다 이와 같은 잔악한 행동을 하여 백성들의 원성과 반감이 대단하여 인심이 이미 항우(項羽)곁을 떠나 한왕(漢王)이신 劉邦에게 기운지가 오래였던 것이다. 이것은 바로 올바른 주인으로 劉邦을 하늘에서 내리신 까닭이다.

그리하여 기원전 202년에 천하를 통일하시고 한제국(漢帝國)을 창건하시어 2월 갑오(甲午)에 남쪽〔사수()갱도서북쪽〕에서 고황제(高皇帝)의 재위(在位)에 등극(登極)하셨으며 장안(長安)에 도읍(都邑)하셨다.

한고조께서는 한제국의 통치방향을 우선 진(秦)의 학정과 오랜 전란(戰亂)에 백성들의 민심을 수습하고 그들의 살길을 도모하는데 최우선을 두고 선정(善政)을 베푸시는 한편 진(秦)과 초(楚)가 패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원인을 가려 이를 점진적으로 국사에 반영시킴으로서 한제국의 초기 기반을 튼튼히 구축하였다. 즉 진(秦)나라가 중앙집권적인 관료제도아래 군현정치(郡縣政治)를 무리하게 급진적으로 강행하여 백성들에게 큰 고통을 주었고 또 가혹한 징발(徵發)과 중세(重稅)및 과중한 노역등에 시달려 원성이 컸으며 이를 견디지 못하고 유민(流民)이 되어 살던 곳을 떠나거나 강제로 노예가 된자가 많아 강권(强權)과 강압(强壓)에 의한 진(秦)의 통일정책의 여파는 온 백성들의 반감을 가져오게 되어 패망하게 되었고,

이어 항우 역시 진(秦)의 무리하고 강요된 악정(惡政)을 또다시 부활시키려고 하다가 민심이 이탈되어 실패한 점을 거울삼아 이 양자(兩者)를 절충한 이른바 군국정치(郡國政治)를 잘 펴나가면서 효제(孝悌)를 중심으로 한 가족도덕을 중시하는 유교(儒敎)가, 중국의 가부장적 가족사회(家父長的家族社會)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가장 적합한 사상과 제도라고 판단하시고 유교(儒敎)를 국교(國敎)로 삼아 인의(仁義)로서 백성을 교화시켜 부모에게 효도하게 하고 어른을 공경하여 신의(信義)로서 도리를 지켜 중(中)을 세우고 화(和)를 주도케 하는 중화사상(中和思想)으로 인륜을 밝게 하셨다.

억울한 죄인을 없애기 위해 형벌을 공정히 다스렸으며 바른 충신(충신)을 목마르듯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재를 등용하는 법이 공정하고 분명하여 어진 사람에게 중직을 맡기고 적재적소에 활용함으로서 요행(僥倖)이 사라졌다. 평온할 때 위태로움을 잊지 않는 위정이덕(爲政以德)으로 그 덕과 위엄이 천하에 미쳐 온 백성들이 요순시대(堯舜時代)를 다시 구가하게된 것이다. 따라서 높고 높으신 한고조의 위대하신 업적과 크나큰 공덕은 아무리 빛나는 훌륭한 문체로서도 표현할 길이 없다 할 것이다.

그리고 한고조께서 한제국을 창건한 이래 후손이 연면(連綿)이 번성(繁盛)하여 五百年 동안 삼십여(三十餘) 군(君)의 황제가 누대(累代)로 제위(帝位)를 계승하신 것 또한 모두 한고조의 은덕(恩德)이며 영광이라 할 것이다. 그래서 한고조의 칭호를 높여 태조(太祖)를 붙여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라 하시었으며 12년간 재위하시다가 서기전 195년에 향년(享年) 53세에 서거(逝去)하셨다.

중원천하(中原天下)를 통일하시고 한제국을 창건하신 한고조의 다음(二 代) 황제는 효혜황제(孝惠皇帝)로서 휘 盈(영)이시며 字는 滿(만)이시고 재위7년에 정년 24세로 서거하시었다.

三代 효문황제(孝文皇帝)이시며 휘는 恒(항)이시고 字는 常(상)이시다. 23년간 재위 하시다가 서거하시니 향년 46세이셨다.

이어 四代 효경황제(孝景皇帝)의 휘는 啓(계)이시고 字는 開(개)로서 16년간 재위하시다가 향년 48세에 서거하셨으며,

五代 황제는 효무황제(孝武皇帝)로서 휘는 撤(철)이시며 54년간 재위하시다가 서거하시니 수(壽) 70세요.

六代 광무황제(光武皇帝)의 휘는 秀(수)이시고 字는 文淑(문숙)이시며 33년 재위하시고 63세에 서거하셨다.

그다음 七代 효명황제(孝明皇帝)께서는 휘 莊(장)이시며 초휘 陽(양)이신데 18년간재위하시다가 48세에 서거하셨으며,

八代황제이신 효장황제(孝章皇帝)의 휘는 (훤)이시고 13년간 재위하시다가 향년 31세에 서거하셨고,

이어 九代황제는 효화황제(孝和皇帝)로서 휘는 肇(조)이시고 17년간 재위하시고 향년 27세에 서거하셨다.

그후 소열황제(昭烈皇帝)의 휘는 備(비)이시며 자는 玄德(현덕)이시고 2년간 재위하시다가 향년 63세에 서거하셨으며,

이어 소열황제(昭烈皇帝)의 아들 後황제의 휘는 禪(선)이시고 자는 公嗣(공사)이신데 41년간 재위하시다가 65세에 서거하셨다.

(史記八卷前漢書:사기팔권전한서)

昭烈皇帝(소열황제) 諱(휘) 備(비)의 약사(略史)

서기 184년 중국후한(中國後漢) 광화6년(光和六年)에 장각(張角)을 수령으로 하여 일어났던 도독을 황건적(黃巾賊)의 난(亂)이라고 하는데, 이때 중원각지(中原各地)에서 군웅(群雄)이 활거하던 시대에 난립되어 있던 대소제국(大小諸國)을 평정시키고 촉한(蜀漢)의 초대황제의 제위(帝位)에 오른 유비황제는 한고조 劉邦의 22세손으로 정통 황손(皇孫)이시다.

소열황제 유비께서는 서기 161년 탁현의 누상촌(樓上村)에서 태어나시어 字를 玄德(현덕)이라 하시었으며 한나라 중산정왕(中山靖王) 劉勝(유승)의 후손이시다.

부친 劉弘(유홍)은 일찍이 별세하시어 생활은 빈곤하였으나 효성이 지극하고 타고난 기품과 골상(骨相)은 천자(天子)의 혈통을 이어받은 후예임이 역력하여, 키는 팔척이요 귀는 유난히 커서 어깨위에 닿았으며 성품 또한 온화하고 후덕하여 너그러운 포용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강인한 의지력과 임기응변하는 지혜와 넓은 식견까지 겸비하고 있었으니 실로 인(仁)과 의(義)와 덕(德)으로 뭉쳐진 영걸(英傑)이시었다.

황건적(黃巾賊)의 난(亂)이 일어나 온 천하가 혼란에 빠지자 공은 관우, 장비등과 도원(桃園)에 제단을 마련하고 천지신(天地神)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의형제의 결의를 맺은 것이다. 비록 같은날 태어나지는 못했으나 생사를 같이 하기로 굳게 다짐하였다.

그러나 의(義)와 예(禮)에 있어서는 군신의 관계를 지키자고 맹세한 것이니 난세(亂世)를 바로 세워 천하를 도모할 영도자를 정하는 의식이었던 것이다.

비분강개와 우국충정이 넘쳐 흐르는 의거(義擧)의 격문을 읽고 구름처럼 모여드는 수많은 의군(義軍)의 의병대장이 된 公은 청주대흥산(靑州大興山)에 웅거하여 양민을 학살하고 재물을 노략질 하는 오만여명의 황건적을 일격에 무찌르는 대승(大勝)첩을 효시로 세상을 크게 어지렵혔던 황건적의 무리를 완전히 토벌하여 그 전공이 하늘에 닿았으나, 부패한 간신배들의 농간으로 인하여 의기(義氣)와 용맹의 합당한 관작은 물론 관기(官旗)도 갖지 못한채 유전(流轉)하며 각지의 군웅(群雄)들과 자웅을 겨루다가,

서기 194년에 서주목(徐州牧)이 되고 후일을 도모하고자 병마를 조련하던중 고사(高士) 사마휘(司馬徽: 水鏡先生)와 서서(徐庶) 단복으로부터 륭중(隆中)고을에 와룡선생 대현인 제갈량(臥龍先生 大賢人 諸葛亮) 字 공명(孔明)은 주(周)나라 800년을 일으킨 태공(太公) 여망(呂望), 또는 한나라 창업 500년의 기초를 닦은 장자방(張子房)에 비길만한 당대의 대재(大材)라는 말을 듣고 감탄한 공은 제갈량을 군사(軍師)로 삼고자 관우 장비와 함께 삭풍(朔風)이 몰아치는 겨울, 제갈량의 초로(草蘆)를 찾아 갔으나, "행운종적(行雲踪蹟)이 일정치 않아 어디에 갔으며 언제 올지 모른다."는 동자(童子)의 말을 듣고 돌아온 공은 섣달 그믐날 살을 예일 듯이 휘몰아 치는 차가운 눈보라 길을 헤치며 제갈량의 초로(草蘆)를 또 다시 찾아간 공에게 "제갈공명(諸葛孔明)은 아침 일찍 어디론가 떠나고 없다" 라는 제갈공명의 아우 말을 듣고 다시 찾아 오겠다는 간절한 뜻을 글로 남기시니 "備(비)가 높으신 이름을 사모한지 오래매 두번 뵙고자 찾아 왔다가 두번다 허행을 하게 되오니 섭섭한 마음 측량할길 없습니다.

備(비)는 한조모예(漢朝苗裔)로서 외람되게 분수에 넘친 명작을 받자왔으나 엎드려 현하정세를 관망하건대 조정이 능체(陵替)하고 강기(綱紀)가 무너지고 군웅(群雄)이 나라를 어지럽게 하고 악당이 천자를 속이니 참으로 備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備는 비록 광제(匡濟)하려는 성심은 있다 하오나 실로 아무런 경륜지책(經綸之策)이 없습니다. 오직 바라옵기는 선생의 인자와 충의이오니 선생은 개연히 여망(呂望)의 대개를 펴시고 자방(子房)의 홍략(鴻略)을 베푸시옵소서, 오늘은 우선 글로 아뢰옵고 다음날 다시 목욕 재개하고 특히 존안을 뵈옵겠습니다." 라고 글을 공명선생의 동생에게 부탁(付託)하고 물러 나왔다.

다시 길일을 택하여 목욕재개하고 세 번째 제갈공명을 찾자 장비는 물론 평소 온후했던 관우까지도 못마땅히 하며 만류하자, 공은 "옛날 주나라의 문왕이 연수(涓水)에 가서 태공망을 찾았을 때 태공망은 낚시를 드리운 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문왕은 그뒤에서 낚시질을 방해하지 않고 해가 질때까지 기다렸던 것이다. 태공망은 그성의에 감동하여 문왕(文王)을 보좌하게 되었고 마침내 800년의 주(周)나라 기틀을 잡게된 것이다.

옛날 사람이 이러했거늘 이정도의 고생쯤은 이 玄德(현덕)은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관우 와 장비를 꾸짖고, 세 번째 제갈공명의 초려문전(草蘆門前)에 이른 공은 제갈공명을 찾자 제갈공명은 그때 초당(草堂)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공은 선생께서 깨기를 기다렸다가 잠에서 깨어난 제갈공명에게 한실(漢室)은 기울고 있으며 간신들은 천자의 총명을 가리우고 역적이 득세하는 이 난세를 구할 방책을 묻고 사부(師父)가 되어 줄 것을 간청하자 청경우독(晴耕雨讀)하고 싶다고 거절하는 제갈공명에게 재차 "지금 공명이 나서지 않는다면 한실의 천하는 망하고 말것이니 슲은 일이다." 라고 탄식하며 다시 간청하자 그때야 제갈량은 "장군은 저를 만나기 위해 제주(諸州)를 헤메셨고 저는 장군의 부름을 받기 위해 오늘까지 초야(草野)에 묻혀 때를 기다렸는지 모르겠다.

별재주도 없는 이에 대하여 삼고(三顧)의 예를 다하고 과분한 지촉(至囑)으로 부르셨으니 견마(犬馬)의 힘을 아끼지 아니하고 국사에 미력을 다하겠다." 라고 응락하면서 공에게 말하되, "북은 조조에게 맡겨 천시(天時)를 차지하고 장군(將軍)은 인화(人和)를 차지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먼저 형주(荊州)를 취하시어 자기집을 삼으시고 그다음으로 서천에 기업을 세워 정족지세(鼎足之勢)를 이루신 연후에 중원(中原)을 도모하게 될것입니다." 라고 공명은 이미 천하가 삼분(三分)할줄 미리 알고 있었으니 참으로 만고에 드문 천하대재(天下大材) 예언가를 얻으셨으니 마치 구름을 헤치고 청천(靑天)을 보는 듯 공께서 몹시 기뻐하셨다.

그때 공의 나이 47세요 제갈공명은 27세였다. 서기 207년 이른바 삼고초려(三顧草蘆) 끝에 제갈공명을 군사(軍師)로 삼은 유비장군은 제갈공명을 오(吳)나라의 손권(孫權)에게 보내어 오(吳)와 군사동맹을 맺게하여 조조와 대결한 것이니 이를 두고 그 유명한 적벽대전(赤壁大戰)이라 하며 이 전투에서 오나라 손권과 유비장군의 동맹군은 불과 5만의 군사로 조조의 80만 대군과 격전 끝에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 청사에 남은 적벽대전의 지역은 지금의 양자강 유역 호북성(湖北省)의 가어현(嘉魚縣)으로서 당시 손권과 유비장군의 동맹군에게 대패한 조조가 혼비백산 페주하다가 관우에게 포로가 되어 죽게된 것을 의리에 강한 조조와의 옛정을 못잊어 그를 살려 보냈던 것이다.

이에 군사인 제갈공명은 군령(軍令)을 저버린 관우를 군율(軍律)에 따라 처단하려하자 공은 군왕의 신분이면서도 신하인 관우를 살리기 위하여 또 다른 신하에게 사죄하는 것도 불사했던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적벽대전에서 대승을 거둔 공은 서기 209년 그 여세를 몰아 형주를 점령하여 국가의 기반을 구축하고 병마를 조련하여 무릉(武陵)에는 장비, 장사(長沙)에는 관우등을 보내어 차례대로 평정하고 그 싸움에서 오호대장(五虎大將)의 한사람인 황충장군(黃忠將軍)을 얻었으며,계양(桂陽)에는 조운을 보내 항복받고 영양(零陽)등 사군(四郡)을 모두 평정하였으며 주변의 대소국을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평정하여 촉한(蜀漢)을 세워 황제의 제위에 오르셨으나,

후주(後主)의 모친은 당양싸움에서 아들을 살리기 위하여 조운에게 맡기고 우물에 뛰어들어 자살하고 감부인은 당양싸움에서 형주를 차지하고 있을 때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손부인(孫夫人)은 공이 육손(陸遜)에게 패하자 죽은 줄 알고 양자강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등 가정에 헤아릴수없는 아품을 당하였으며, 도원의 의형제인 관우는 형주에서 오나라 여몽대장에 게 사로잡혀 죽었고 이를 안 장비는 그원수를 갑고자 오나라에 진격하다가 부하에게 죽음을 당하는 등의 애석함을 안고 재위 2년 동안에 인의덕(仁義德)을 겸비한 황제께서 공명선생과 같은 천하 대재(大材)의 도움을 얻어 정사를 베푸시다가 천수를 다하지 못하시고 서거하시니 향년 63세이시었다.

태자유선(太子劉禪)이 후황제(後皇帝)에 즉위하셨으니 한고조의 23세손이시고 재위 41년에 향년 65세에 서거하셨다. 아버지 소열황제께서는 임종때 차남노왕(次男魯王)을 불러 "내가 죽은 뒤에 너희들 형제는 승상 제갈공명을 아버지로 생각하고 섬기도록하라. 무슨 일이든지 승상의 가르침을 따라야만 한다." 라고 하셨다. 또 소열황제는 유언으로 부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勿以善小而不爲(물이선소이불위:선한일은 아무리 작은것이라 할지라도 아니하지 말것이며) 勿以惡小而爲之(물이악소이위지:악한일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결코 하지 말아야 한다)" 라고 하셨으며 "현(玄)과 덕(德)은 사람을 움직이는 근본이니 이를 항시 잊지마라" 는 유훈을 남기셨다.

유씨 도시조(劉氏 都始祖) 약사

우리나라 劉氏 都始祖 (유씨 도시조 유전)

우리나라 유씨의 도시조(都始祖)는 고대 중국 한(漢)나라 태조 고황제(太祖 高皇帝)의 사십세손이신 휘는 전(筌)이시고 자는 原甫(원보)이시며 호는 竹諫(죽간) 시호는 文襄(문양)이시다.

공은 중국 강소성 롱서현(中國 江蘇省 西縣)에서 서기 1051년 4월 8일에 출생하시어 송(宋)나라의 정현대부 한림학사 병부상서(正憲大夫 翰林學士 兵部尙書:우리나라 현 국방부장관)로 재임하셨으며 배(配:아내배)는 진한국부인롱서이씨(辰韓國夫人西李氏)이시다 .

공(公)의 증조부(曾祖父)에 휘는 宗(종)이시고 벼슬은 송조한림(宋朝翰林)이셨으며 조부(祖父)의 휘는 迪(적)이시며 벼슬이 송조이부상서(宋朝吏部尙書)이셨다. 또한 부친의 휘는 采(채)이시고 벼슬은 송조 금자광록대부(宋朝金紫光錄大夫)이셨다.

공께서는 천성(天性)이 어지시면서도 강직하시어 바른 직언(直言)을 삼가 하지 아니하셨고 불의(不義)와는 타협을 하지 않는 곧은 성품이셨다. 또 학문이 깊고 넓으셔서 통달(通達)하지 아니한 서적(書籍)이 없으셨으니 역경(易經), 서경(書經), 시경(詩經), 예기(禮記), 효경(孝經), 춘추(春秋), 논어(論語), 맹자(孟子), 주역(周易),등 구경(九經)과 많은 학자들의 글을 빼놓지 아니하시고 암기하셨으며 천문지지학(天文地誌學)과 의약복서(醫藥卜筮)에 이르기까지 연구하시어 세상사람들이 공에 대하여 말하기를 "나라를 경륜하고 세상을 구제할 만한 큰 인재다" 라고 칭찬이 자자 하였다. 위와 같은 세평(世評)은 적중되었다.

공께서 송조(宋朝)의 신종대(神宗代)에 병부상서직(兵部尙書職)에 재임하실 당시 집현전(集賢殿)에서 대악(大樂)을 의논하여 정할 때 왕이 환관(宦官)까지 의논에 참관(參觀)하게 하자 공은 이에 부당함을 간청하여 참관을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공어사(孔御史)는 공(公)과 함께 간(諫)하다가 어사직을 파직당하기까지 하였다. 이에 공은 왕에게 극간(極諫)하기를 "궁중(宮中)에서 상명(上命)을 맡은 관서(官署)에 환관이 바른 직언을 배제하는 까닭은 폐하(陛下)의 선명하심을 보이지 않도록 가리어 숨기고 천하(天下)사람들의 입을 다물게 하려는 것입니다." 라고 하자 간신(奸臣)들은 서로 작당(作黨)하여 공에 바른 직언을 묵살시키고자 "왕의 커다란 선정(善政)에 비하면 마치 옥에 티와 같은 것을 침소봉대(針小棒大)하여 간(諫)하는 것이다" 라고 공을 모함하여 왕의 총명을 흐리게 하였던 것이다.

또한 당시 송조(宋朝)의 영상 왕안석(領相 王安石)이 청묘취식법(靑苗取息法)이라는 기괴한 악법을 제정하여 이법이 백성을 가혹하게 착취하는 악법(惡法)임을 지적하고 이법 시행의 부당성과 법의 폐지를 극간(極諫)하시다가 간신들의 모함으로 인하여 또다시 실패하셨던 것이다.

왕안석이 제정한 청묘취식법이란 당시 백성들간에 고리(高利)가 성행되어 이를 막기위해 나라에서 년이분(年二分)의 이자로 빌려주고 추수기(秋收期)에는 그 원리(元利)를 반환케 하던 법이며 또한 국고가 비어 국고를 채우기 위하여 논과 밭에 푸른싹을 보고 추수도 하기전에 미리 세금을 부과하던 법으로써 이법은 백성을 위한 법이라는 명분뿐이고 실제로는 송조(宋朝)가 부패(腐敗)한 나머지 백성들을 가혹하게 착취하는 악법이었기에 공은 이법의 폐지를 극간하시다가 간신들의 모함을 입으시고 "진실한 직언을 용납지 않는 이땅에서는 더 머물수 없다." 하고 평소 뜻을 같이하던 동지칠학사(同志七學士) 임팔급(林八及), 설인검(薛仁儉), 허동, 송규(宋奎), 최항(崔沆), 권지기(權之奇), 공덕수(孔德狩)와 더불어 표연(飄然)히 배 를 타고 절역(絶域)의 바다를 건너 동쪽나라인 우리나라에 서기 1082년인 고려 문종(高麗 文宗) 36년 8월에 경북(慶北) 영일군(迎日郡) 기계면(杞溪面)에 오셨다.

당시 공의 춘추(春秋) 32세이셨으며 이분이 바로 우리나라 劉氏의 도시조(都始祖)이시다. (소위팔학사(八學士)라고 한다.)

도시조께서는 우리나라에 오시어 40여년 동안 지으신 시(詩)가 수백수 이었으나 아깝게도 많이 유실(遺失)되고 지금 134수가 보존되어 있는바 그중에 몇수를 소개하면 "이내몸 한번 고려에 온뒤로 어찌하여 고국수심 잊어버리랴, 그리운 우리 임금 언제 보았던고 보고파 쏟는 눈물 금할수 없어라."

自東來後 那忘故國愁(자동래후 나망고국수) 美人長不見 難禁涕橫流(미인장불견 난금체횡류) 라고 읊으셨고 또한 추송태기(愁送台記)와 시에 가로되 "쓸쓸한 가을날 수송대에 올라서 내시름 멀리 고국으로 보내노라, 그러나 어느곳이 중국땅인지 사람들은 아쉬움을 몰라주노라." 라고 하셨으며 또 자경시(自警時)가 있으니 "도덕을 지키면 가난도 좋고 글월을 대하니 세속과는 멀어지네 이마음 굳게 잡아 놓이지 않으면 그제야 본성이 돌아오리라." 하셨다. 이 시 삼수(三首)만 보아도 공의 학문이 어느 경지에 이르렀으며 왕에 대한 충성하는 마음이 어느정도 이었던가를 가히 알수 있을 것이다.

공께서는 정학(正學)을 창도(倡導)하는 것을 자신의 책무(責務)로 여기시고 글방을 만들어 예악(禮樂)을 진흥시키는데 최선을 다하심으로써 조정(朝庭)은 물론 많은 백성들이 공을 존경하여 공으로부터 학업을 익히는 자가 수천명에 달하였다.

고려 문종(1019~1083)께서 수차 측근(側近)을 보내어 벼슬길에 나오시도록 권유하였으나 가난함에 만족하시고 오직 유도(儒道)를 정도(正道)로 삼아 사람들을 교화(敎化)시키는데 전심전력(全心全力)을 다하시어 이단(異端)을 배척하고 정학(正學)인 유도(儒道)를 밝힘으로써 삼한시대(三韓時代)의 사도(邪道)와 구악습(舊惡習)이 일소되어 온나라가 태평성대(太平聖代)로 순화(醇化)됨으로써 조정(朝庭)에서는 "하늘이 공과 같은 철인(哲人)을 중국에 태어나시게 하여 공으로 하여금 선도(善導)를 우리나라에 펴서 구습(舊習)을 씻어내고 태평성대를 이루게 한 것이다." 라고 하시며 그 공을 높이 찬양하였다.

공은 서기 1122년 2월 7일에 수(壽) 72세로 서거하시었으며 공의 부인 역시 서기 1123년 6월 7일에 향년(享年) 45세에 서거하셨다. 고려 예종왕(1079~1122)께서는 예관(禮官)을 보내어 후장(厚葬)케 하셨으니 공의 묘는 거타군 북명천면 덕곡산하 계량동, 즉 지금의 경북 영천시(永川市) 녹전동(祿田洞) 비석촌(碑石村)에 양위(兩位)분을 상하봉(上下封)으로 모셨다.

공께서는 세분의 아드님을 두셨으니, 장자(長子)에 堅規(견규: 거창,강릉분관)이시고 고려에서 봉익대부도첨의찬성사(奉翊大夫 都僉議贊成事)정승으로 거타군(居陀君)에 봉작(封爵)되시고 차자(次子)에 휘 堅矩(견구: 아림파)는 고려조에서 광정대부밀직사 대사헌을 역임하셨으며 삼자(三子) 휘 堅益(견익: 백천파)은 봉익대부 이조판서 대사헌이셨다.

충렬왕(忠烈王)때에 한림학사(翰林學士) (설장수), 대제학(大提學) 朴宣忠(박선충), 朴尙衷(박상충), 대사성(大司成) 李文靖(이문정)등 재신(宰臣)들이 상소(上疏)하기를 文襄公 (문양유전)은 동방에 도학(道學)을 창도(倡導)한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조종(祖宗)으로써 그 훈덕(勳德)이 옛날 주공(周公), 소공(召公)과 태공(太公)에 비할만한 분이니 사당(祠堂)을 지어 봉향(奉享)함이 마땅하다고 하여, 이에 왕은 즉각 특명으로 공의 시호(諡號)를 文襄(문양)이라 하시고 예관(禮官)을보내어 위령제를 지내고 개성부(開城府)에 사당을 건립하여 영령(英靈)을 안주케 하셨으며 숭의전(崇義殿)에 배향(配享)하여 나라와 더불어 영원히 함께 빛나게 하였고 전답(田畓)과 노복(奴僕)을 하사(下賜)하시어 생전에 공덕(功德)을 크게 보답하는 은전(恩典)을 베풀었다. (자료출처 : 강릉유씨 홈페이지)

석물(石物)로는 신도비(神道碑), 토지수조세(土地收租稅) 4萬 5里,위토전(位土田)이 오백두락(五百斗落: 약 10만평), 율목(栗木:밤나무) 300주, 대추목(대추나무) 200주가 하사되었고 제실(齊室) 이름은 수송대(水松坮), 정침오간(正寢五間), 동행랑(東行廊), 서행랑(西行廊)이 각각 삼면(三面)과 하마비, 제실(下馬碑 齊室)이 있었다.

이를 관리하는 사람은 정대옥(鄭大玉)이었다. 대현묘(大賢墓:문양공 묘소)를 잘 관리하여야 할 정대옥은 오히려 우리 유씨(劉氏)의 자손이 점점 약해지는 기회를 틈타 유씨제실(劉氏齊室)에 침주하여 산림을 울창하게 하여 사파전토(왕이하사한 밭과 토지)를 자기소유로 만들고 묘표석(墓表石)과 신도비(神道碑), 기타 묘전석물(墓前石物)등을 암암리에 모두 빼다가 암매(暗埋)해버렸다.

그리하여 정대옥은 대대부호로 살아왔다. 지금 상서공(尙書公) 묘단하(墓段下)에 있는 고총(古塚:봉분)은 정대옥의 외손자인 이주관(李周寬)이 파장(把葬)한 묘(墓)이며, 근래에는 더욱 불량하고 나쁜 정모(鄭某)라는 자가 석물을 빼서 주춧돌, 다듬이돌, 제방수문돌 등로 악용하고 전해오던 제실은 뜯어다 몇 해 동안 자신들의 가옥을 개축하는데 이용하는 등 악행을 일삼다가 정가수십가(鄭家數十家眷)들이 몰사하였다. 정총이위(鄭塚二位:정씨묘 2기)는 굴거(掘去:옮김)하였으나 일위(一位:묘 1기)는 기소중(起訴中)인데 이 묘는 임진왜란때 전몰장병의 초혼장(招魂葬)이라고 한다.

도시조 竹諫先生(죽간선생)의 시

自警(자경) : 스스로 깨우침

求道貧猶樂(구도빈유락) : 도덕을 지키면 가난해도 좋고

看書俗與疎(간서속여소) : 글월을 대하면 세상과는 멀어지네

此心操不舍(차심조불사) : 이마음 굳게 잡아 놓이지 않으면

然後復其初(연후복기초) : 그제야 본성이 돌아오리라.

詠雪中松(영설중송) : 눈가운데 소나무를 읊음

蒼蒼冬獨秀(창창동독수) : 겨울에도 푸릇 푸릇 우거진 너에게

霜雪莫能侵(상설막능침) : 눈보라도 지조만은 꺽지 못하네

非但材成棟(비단재성동) : 자라서 큰재목 되기도 하려니와

最憐不變心(최연불변심) : 보다도 사랑스러은 것은 변치 않는 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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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능유씨 대동보

2006/07/30 21:06
 

江陵劉氏 大同譜

[1세]

유전(劉筌):

한국유씨 시조, 동국시조

유전 시조 탄생 및 송(宋)나라 병부상서(지금의 국방장관)사임과 고려로 망명이유**

유전 시조께서는 한 고조 유방 황제江陵劉氏 大同譜 

로부터 1200년후 1051년 4월 8일 중국 강소성 팽성(彭城)에서 출생하셨으며 이는 한 고조로부터 40세계에 해당된다.(송 인종, 고려 문종 5년)

송나라 6대 신종 때 병부상서에 재직 중이었던 시조께서는 당시 재상이었던 왕안석의 신법에 반대하여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 `중국에서 살 수 없어 한국으로 망명하는 비운을 겪게 된다.

시조의 망명은 중국역사와 관계가 깊다. 당나라가 양귀비로 인해 국력이 쇠퇴하여 9세기에 멸망하고, 5대10국이라는 여러 나라가 생기고, 50년 후 서기 960년에 송나라가 건국된다. 송나라는 국내의 무력분쟁을 예방하기위해 문민우대 정책을 사용했지만 그 결과 무관천시로 군사력이 약해져서 만주에 있던 여진 및 거란족에 수시로 침략을 당한다.

견디다 못한 송 6대 신종은 왕안석을 정승으로 하여 정치개혁을 하였으나 과도한 정치개혁과 심한 권력투쟁으로 실패하고 만다. 이 신법 중에는 청묘법이 있는데 이는 호족,상인등 보수파의 구법당과 개혁을 원하는 신법당과의 정쟁에서 신법당의 개혁이 온당치 못하다고 당시 병부상서였던 시조 등 구법당이  반대하였으나 결국 실패하자 동지였던 7학사와 함께 한국으로 망명을 실행하였으며 결론적으로 송나라 때 왕안석의 신법의 시행이 아니었다면 망명은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시조께서는 강소성 팽성 출신인데 이 팽성은 중국시조 漢 高祖의 출생지인 패현에서 가깝고 한 고조가 항우와 결전을 하여 승리한 곳이다. 시조 '전'자의 할아버지께서는 한국 망명시 32세로 송대의 6대 신종, 고려대의 문종36년 1082년 8월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경북 영일군 기계면 용포리 해안에 상륙하였고 상륙지 근처 8학산 밑에서 거주했다. 산 이름도 8학사가 왔다 하여 8학산이라 했다 한다.

시조께서 통일 중국의 송나라때인 30세에 국방장관이었다면 그 시대에서는 상당히 능력 있는 인물로 평가되었으리라고 본다. 한국 상륙지점은 현재 구룡포이며 시조의 발자취가 구룡포에서 발견되었다. 시조의 사적 1집에서는 옛 부터 중국에서 한국을 작은 중국이라 하고 공자도 배를 타고 동국으로 오지못하였음을 한탄한 바 있었는데 시조의 충언을 들어주지 않으니 답답한 마음으로 동쪽으로 해상을 바라보니 넓은 뽕나무 들판에 한 지역이 아침빛이 선명하여 고려로 왔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시조가 구룡포에 상륙한 이유에 대한 생각**

시조는 강소성 출신이다. 예로부터 劉씨들은 산동성과 강소성에 많이 살았고 강소성은 한국의 전라도와 마주보는 곳으로 그 당시 시조의 직책이 국방장관이었음으로 중국의 주변사정을 잘 알고 있었고 북으로는 몽고와 만주의 여진 글안족 때문에 육로로의 탈출도 어렵고 남쪽은 월남땅 오지이고 서쪽도 길이 멀고 하여 송나라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고려로 망명지를 택했고 강소성이 해안을 끼고 있어 무역을 하던 고려의 사정을 잘 알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가까운 전라도로 상륙하지 않고 경북 포항 앞 바다까지 온 것은 조금이라도 송나라와 멀리하고자했던 시조의 바램이 있었을 것이며 음력8월이면 초 가을철이라 이때는 북서풍이 조금씩 불어 그 영향으로 그 시대의 배이던 범선으로 제주도 근해까지 편하게 왔을 것이다. 제주를 지나 조류와 해류를 타고 안전한 포항 앞 바다로 들어온 것 같다. 선박의 크기는 선원들을 포함하여 승선인원 30-40명 정도이고 톤수는 약 50톤 정도가 아닌가 생각되며 출발지는 산동성의 청도(중국 칭따오)부근이고 영일군까지는 약10-15일간 항해했으며 리수로 2500-2700리의 거리라 생각된다. 이는 본인의 30년간의 선박생활 경험에 의한 수치이다. <발췌:거창유씨 유동수>

한국(고려)에서의 생활**

배편으로 중국을 떠나올 때와 망망대해에서의 서글픈 심정을 시로 남겼고 한국에 와서도 고향과 송황제를 그리워하는 많은 글을 남겼다. 처음은 8학산 밑에 거주하였으나 나중에 영천군(거타군, 동거군, 영양군)으로 이주하였고 문종시에는 고려정부에서의 관직을 사양하였으나 고려 숙종시(1096-1105)에 입조하여 이후 후손은 고려정부에서 높은 벼슬을 살았다.

시조의 처음관직은 고려 선대 왕들의 제사를 지내는 국자감 이었고 후손들은 현감에서부터 대제학, 대사헌, 추밀부사 이었고 시조께서는 고려예종 17년 1122년 2월 7일 향년 72세로 별세했다.

고려정부에서는 시조의 높은 학문과 공을 인정하여 장남을 거타군으로 봉하고 차남은 아림군 삼남은 백천군 으로 봉했다.

시조에서부터 8대까지 주 거주지가 당시 서울이었던 개성과 영천이었고 8대에서 장남은 거타군으로 차남은 옥천으로 분파된다.(옥천은 강릉의 옛 이름이고 강릉 劉氏의 증시조가 된다).

고려실록(고려대 실기)에 의하면 고려 충순왕 때 거타군 북 명천면 덕곡산하 계양동에(지금의 영천군이며 일명 鳴山面 花枝洞)죽간선생의 묘가있고 사패지(賜牌地:왕으로부터 받는 패와 토지)는 사방으로 5리(2km)이고 그중에 위토전(位土田) 즉 밭이 10만평 밤나무 300주 대추나무 200주가 잇으며 개펄밭이 좌우로 둘러있다.

제실이름은 수송대(水松臺) 정침 5간이라 기록되어있다. 구족보에는 愁送臺(수송대:그리워 하는 심정을 보내고 싶은 마음)라고 적혀있다. (세보1권111쪽)할머니는 감숙성 농서현 출생 농서이씨 정경부인이시다.

묘소와 재각(齋閣)은 경북 영천시 녹전동 진한국부인 농서이씨(李氏)와 같이 모셨으며 구인재(求仁齋)라 불리우는 재각과 신도비 문배석(文拜石) 장명등(長明燈) 동자석(童子石) 양마석(羊馬石)이 있다.

시향(時享)은 매년 음10월 초1일이다.

 

[2세]

유견규(劉堅規)-거창,강릉계(본관-거창)

유견구(堅矩)- 유웅렬(아림군계):(본관-거창)

유견익(堅益)-백천계(본관-배천)

**劉氏 종손 거창 거주 (居昌 劉氏와 江陵 劉氏의 갈림길)**

관직에 있었던 거타군의 후손들이 이성계의 반란에 심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거타군 9대(환)의 관직은 고위직인 밀직사사겸대사헌으로 도저히 이성계의 혁명에 동조할 수 없어 朝鮮에 불복하고 居昌에 낙향하여 영사정(永思亭)으로 칩거하였다.

거창에 온 이유로는 당시 안의군에 있던 장인의 죽음으로 안의(거창)에 내려와 살게되었으며 瀯溪(영계)선생의 신도비는 이조말기에 세워졌다.

12대의 강릉쪽의 "창" 조(祖)는 고려말 충신이었던 정몽주의 문하생이었지만 이성계의 혁명에 가담하여 혁명주체가 되어 이조개국 공신이 되고 옥천부원군이 된다.

8세계에서 분리된 강릉(옥천)의 후손들은 옥천부원군을 중심으로 고위 관직을 유지하고 번창하였으며 현재 서울에서의 劉씨 유명인들의 대부분이 강릉 劉씨이다.

이후 거창쪽은 숨어 살았고 영원히 사모한다는 ""영사정""을 세워 멸망한 고려를 생각 하면서 깊은 산속의 거창에서 은둔 생활을 한 관계로 충신으로서의 절개를 지킴은 높이 평가 될 수 있으나 후손은 강릉에 비해 나약하고 편협되며 자기발전을 등한시 하여 가문전체가 정체된 상태에서 생활하게된다.

지금 생각하면 9세계의 선조가 과연 그 문란하고 도덕성도 결여된 퇴폐한 고려조에 충성함이 타당했던지 생각 해볼 문제고 강릉의 옥천부원군과 같이 이성계 정부에 참여 했다면 후손들은 많이 달라 졌을 것이다.

더구나 거창이라는 남쪽의 지역 관계로 수시로 침략 해왔던 일본인들에 많은 인명과 재산을 뺏기고 이로인한 강릉과의 인구 대비도 엄천난 약세이다. (강릉16만, 거창3만) 9세계에서 15세계까지 거창의 마리면, 위천면에서 주거 하였고 이조때의 벼슬은 교위같은 하급직이고 장군도 한분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거창 유씨 안에 거타군파와 아림군파가 같이 존재한다.

시조의 3 아들중 첫째 거타군 이후 9 세계 때 거타와 강릉으로 분리되고 둘째는 아들때(시조의 손자-유웅렬) 아림군으로 셋째에서는 8 세계에서 백천으로 분리 된다.

거타군은 현재의 시조 산소가 있는 영천군의 옛 이름이다(거타군,동거군,영양군,영천군, 세보P109 110 111, 대동보 30 31) 거타군은 시조의 신도비문에 적혀 있다.

고려 실기에도 거타군 (현 영천군) 이라 나온다. 족보상의 거타군과 거창은 관계가 없다 혹시 거창의 옛 이름이 거타라고 할 수 있는데 그래도 우리 족보상의 거타군과는 아무 관계없다. 거창의 옛 지명에 거타라는 기록도 전혀 없다.

고려 정부에서 받은 논, 밭, 과수의 땅은 지금의 영천이다. 조상의 산소도 영천과 근처에 있다. 처음 족보의 기축보 제작시(1769년 영조 45년) 당시 劉씨 본거지의 거창을 기준으로 거창 유씨라 하였고 타 성씨들의 비문이나 족보 서문들은 거창을 거타군과 유관하다 하였으나 이는 이조 말엽이나 1900년 이후 글 이고 근거없는 오기이다.

9 세계(환) 때 거창으로 온 이유는 처가가 거창이라 왔고 비문은 약200년 이후 기술 된 것이다

[3세]

유춘무(劉春茂)

고려시대  판삼사사(삼사) : 종1품(判三司事 從一品)

고려시대 무관, 문관의 계급

파란 글씨가 최고 벼슬입니다

무관의계급 품계 지금의

장교계급 문관직

 정1품

 

  태사 태부 태보 대위 사도 사공

 종1품     중서령, 문하시중, 상서령, 6부 판사 (재상겸직)

 감수국사 (시중 겸직), 판삼사사(삼사) 

 정2품     중서시랑평장사 문하시랑평장사(중서문하성)

 좌우복야(상서성), 수국사 동수국사(재상겸직)

 종2품     참지정사 정당문학 지문하성사(중서문하성),

 판추밀원사 동지추밀원사 추밀원사(중추원)

 상장군 정3품 대장   좌우상시(중서문하성), 어사대부 (어사대)

 추밀원부사 좌우승선(중추원), 상서(6부)

 대장군 종3품 중장   좌우승(상서성), 지사(6부), 사천감(사천대)

 위위경(위위시), 전중감(전중성)

 장군 정4품 소장,준장    좌우간의 대부(중서문하성), 시랑(6부) 군기감(군기감)

 종4품     어사중승 지어가대사(어사대), 국자사업(국자감)

 소감 소경(각사)

 중랑장 정4품 대령   좌우사랑중(상서성), 랑중(6부),

 시독학사 시강학사(한림원), 합문사(합문)

 종5품     기거주 기거랑 기거사인 (중서문하성),

 어사집산 시어사(어사대)

 랑장 정5품 중령   좌우보궐(중서문하성),좌우사원외랑(상서성)

 원외랑(6부), 전중시어사(어사대)

 종6품     좌우습유(중서문하성),좌우사원외랑(상서성)

 원외랑(6부), 전중시어사(어사대)

 별장 정6품 소령   당후관(중서문하성), 국자박사(국자감)

 통신사인 합문지후(합문)

 종7품     주부(각사), 권지합문지후(합문)

 산원 종7품 대위   사문박사(국자감)

 종8품     율학박사(형부), 직사관(사관)

 교위 정9품 중위   학정 학록(국자감)

 대정 정9품 준위,소위   율학조교(형부),서학박사 산학박사(국자감

[4세]

     유성(劉成)

     고려시대 때 추밀원부사 정3품(樞密院副使 正三品)를 역임하셨다.

고려시대 무관, 문관의 계급

파란 글씨가 최고 벼슬입니다

무관의계급 품계 지금의

장교계급 문관직

 정1품

 

  태사 태부 태보 대위 사도 사공

 정1품     중서령, 문하시중, 상서령, 6부 판사 (재상겸직)

 감수국사 (시중 겸직), 판삼사사(삼사) 

 정2품     중서시랑평장사 문하시랑평장사(중서문하성)

 좌우복야(상서성), 수국사 동수국사(재상겸직)

 정2품     참지정사 정당문학 지문하성사(중서문하성),

 판추밀원사 동지추밀원사 추밀원사(중추원)

 상장군 정3품 대장   좌우상시(중서문하성), 어사대부 (어사대)

 추밀원부사 좌우승선(중추원), 상서(6부)

 대장군 정3품 중장   좌우승(상서성), 지사(6부), 사천감(사천대)

 위위경(위위시), 전중감(전중성)

 장군 정4품 소장,준장    좌우간의 대부(중서문하성), 시랑(6부) 군기감(군기감)

 정4품     어사중승 지어가대사(어사대), 국자사업(국자감)

 소감 소경(각사)

 중랑장 정4품 대령   좌우사랑중(상서성), 랑중(6부),

 시독학사 시강학사(한림원), 합문사(합문)

 정5품     기거주 기거랑 기거사인 (중서문하성),

 어사집산 시어사(어사대)

 랑장 정5품 중령   좌우보궐(중서문하성),좌우사원외랑(상서성)

 원외랑(6부), 전중시어사(어사대)

 정6품     좌우습유(중서문하성),좌우사원외랑(상서성)

 원외랑(6부), 전중시어사(어사대)

 별장 정6품 소령   당후관(중서문하성), 국자박사(국자감)

 통신사인 합문지후(합문)

 종7품     주부(각사), 권지합문지후(합문)

 산원 종7품 대위   사문박사(국자감)

 종8품     율학박사(형부), 직사관(사관)

 교위 정9품 중위   학정 학록(국자감)

 대정 정9품 준위,소위   율학조교(형부),서학박사 산학박사

[5세]

     유찬(劉讚)

   

     고려시대 밀직사사 정3품(密直司事 正三品)

고려시대 무관, 문관의 계급

파란 글씨가 최고 벼슬입니다

무관의계급 품계 지금의

장교계급 문관직

 정1품

 

  태사 태부 태보 대위 사도 사공

 종1품     중서령, 문하시중, 상서령, 6부 판사 (재상겸직)

 감수국사 (시중 겸직), 판삼사사(삼사) 

 정2품     중서시랑평장사 문하시랑평장사(중서문하성)

 좌우복야(상서성), 수국사 동수국사(재상겸직)

 종2품     참지정사 정당문학 지문하성사(중서문하성),

 판추밀원사 동지추밀원사 추밀원사(중추원)

 상장군 정3품 대장   좌우상시(중서문하성), 어사대부 (어사대)

 추밀원부사 좌우승선(중추원), 상서(6부)

 대장군 종3품 중장   좌우승(상서성), 지사(6부), 사천감(사천대)

 위위경(위위시), 전중감(전중성)

 장군 정4품 소장,준장    좌우간의 대부(중서문하성), 시랑(6부) 군기감(군기감)

 종4품     어사중승 지어가대사(어사대), 국자사업(국자감)

 소감 소경(각사)

 중랑장 정4품 대령   좌우사랑중(상서성), 랑중(6부),

 시독학사 시강학사(한림원), 합문사(합문)

 종5품     기거주 기거랑 기거사인 (중서문하성),

 어사집산 시어사(어사대)

 랑장 정5품 중령   좌우보궐(중서문하성),좌우사원외랑(상서성)

 원외랑(6부), 전중시어사(어사대)

 종6품     좌우습유(중서문하성),좌우사원외랑(상서성)

 원외랑(6부), 전중시어사(어사대)

 별장 정6품 소령   당후관(중서문하성), 국자박사(국자감)

 통신사인 합문지후(합문)

 종7품     주부(각사), 권지합문지후(합문)

 산원 종7품 대위   사문박사(국자감)

 종8품     율학박사(형부), 직사관(사관)

 교위 정9품 중위   학정 학록(국자감)

 대정 종9품 준위,소위   율학조교(형부),서학박사 산학박사(국자감)

[6세]

    유승(劉昇)

    고려시대  판전리사사 정3품(判典理司事 正三品)을 역임하셨다.

고려시대 무관, 문관의 계급

파란 글씨가 최고 벼슬입니다

무관의계급 품계 지금의

장교계급 문관직

 정1품

 

  태사 태부 태보 대위 사도 사공

 종1품     중서령, 문하시중, 상서령, 6부 판사 (재상겸직)

 감수국사 (시중 겸직), 판삼사사(삼사) 

 정2품     중서시랑평장사 문하시랑평장사(중서문하성)

 좌우복야(상서성), 수국사 동수국사(재상겸직)

 종2품     참지정사 정당문학 지문하성사(중서문하성),

 판추밀원사 동지추밀원사 추밀원사(중추원)

 상장군 정3품 대장   좌우상시(중서문하성), 어사대부 (어사대)

 추밀원부사 좌우승선(중추원), 상서(6부)

 대장군 종3품 중장   좌우승(상서성), 지사(6부), 사천감(사천대)

 위위경(위위시), 전중감(전중성)

 장군 정4품 소장,준장    좌우간의 대부(중서문하성), 시랑(6부) 군기감(군기감)

 종4품     어사중승 지어가대사(어사대), 국자사업(국자감)

 소감 소경(각사)

 중랑장 정4품 대령   좌우사랑중(상서성), 랑중(6부),

 시독학사 시강학사(한림원), 합문사(합문)

 종5품     기거주 기거랑 기거사인 (중서문하성),

 어사집산 시어사(어사대)

 랑장 정5품 중령   좌우보궐(중서문하성),좌우사원외랑(상서성)

 원외랑(6부), 전중시어사(어사대)

 종6품     좌우습유(중서문하성),좌우사원외랑(상서성)

 원외랑(6부), 전중시어사(어사대)

 별장 정6품 소령   당후관(중서문하성), 국자박사(국자감)

 통신사인 합문지후(합문)

 종7품     주부(각사), 권지합문지후(합문)

 산원 종7품 대위   사문박사(국자감)

 종8품     율학박사(형부), 직사관(사관)

 교위 정9품 중위   학정 학록(국자감)

 대정 종9품 준위,소위   율학조교(형부),서학박사 산학박사(국자감)

[7세]

     유해(劉海)

     고려시대 대제학 정2품(大提學 正二品)을 역임하셨다

[8세]

     유흡(劉洽)-거창계,

     유연(劉沿)-강릉계

     고려시대 대제학 정2품(大提學 正二品)을 역임하셨다.

[9세]

    유환(劉환):거창계

**義士公파 (의사공파, 거창 유씨 종가 집 ) **

거창의 15세계 (名盖) 께서는 정유재란에 내외분 같이 황석산성에서 순절하고 의사공파는 이분의 후손이다. 임진왜란으로 국토가 유린되고 정유년에 일본이 다시 조선을 재침했을 때 경남지방에 곽제우장군을 정점으로 광범한 각계층의 집합체인 민병대가 조직되고 전투도 치열해져 우세한화력의 일본군에 밀리던 조선군은 황석산성으로 모여 최후의 결전을 하지만 세부족하여 전멸상태에 이른다.

이때 선조 내외분은 도피하라는 주위의 만류를 제치고 후계를 위해 아들을 사전에 심부름을 보내놓고 성문을 닫고 결전에 임하였다. 성 안으로 들어가 부모와 같이 죽겠다는 아들을 후손을 위해 빨리 도망하라는 말을 남기고 내외분은 일본군과 싸우다 당시 거창 곽 군수와 같이 장렬히 순절하였으며 조정에서는 그에게 義士(숙종을미1715년 義士로 황암서원에 배향, 황암충열사)칭호를 내렸으며 그로부터 의사공파로 내려온다.

후손인 본인의 입장으로 만약 그분이 서울근방의 지역에서 전투를 하다 순절하였다면 사후의 대우도 달라졌고 또한 후손의 대접도 많이 달라졌으리라 생각된다. 곽재우 장군의 사후 대우가 서산대사나 사명당과 차이가 나는 실정이다.

황석산성은 현재 함양군과 거창군사이에 있고 함양군의 농을정에서 전라도 장수로 가는 길 옆에 있으며 산성은 거의 없어진 상태로 남아있고 문화 유적지로 복원되고 있는 상태이며 의사공 할아버지 묘소는 황석산성에서 거창쪽으로 위치하고 황석산성 밑 계곡 물은 유원지인 농월정으로 흘러 세인을 시원하게 해주고 있다. 16대, 17대는 거창,안의에서 거주했다.

우리나라족보는 1546년부터 시작되었고 劉씨들은 타성들의 시기로 족보없이 지내다가 중국사신에 돈을 주고 부탁하여 당시의 중국정부에 劉씨한분(劉庸)이 장관(상서)으로있어 이분으로부터 중국판각본을 얻어 족보에 수록, 발간하게 되었다. 居昌1769년(영조45)기축보. 江陵1761년(영조37)신사보 대동보 1975년

**金海(김해)로**

18대의 장남(潤禧)은 안의, 차남(潤祺)은 산청에 거주하였고 아드님이 당시에 산청,밀양등 경상도의 유명한 한의사이신 유이태(劉以泰)이시고 TV에서 동의보감 허준의 스승으로 나온다. (1715년 별세) 삼남은 실기, 사남(潤雲)은 김해녹산, 오남(潤達)은 김해,진영 죽곡으로 이주했고, 진영에서 19,20대까지 거주했다. 20대 할아버지(한웅)는 1709년 숙종35년생이며(유연진 9대조)산소는 월영산묘사 1번째 묘소고 21대(유연진8대조)할아버지는 (인갑)1734년 영조 10년생(신기윗묘)으로 이 할아버지를 정점으로 이후 진례 창원 퇴례 명동 장유 마사로 분류 오늘에 이른다.

조상의 발걸음을 추적한 이유는 정확한 뿌리를 알고자함이고 지난날을 돌이켜보고 건강한 삶과 노력하는 내일을 기약하기 위함이라 할 수 있다. 대한민국 건국후 유씨들의 첫 번째 높은 관직이 國防長官, 國務總理이고 김해 서북지역의 종손이 육군 대령 출신임이 우리들 劉氏들의 시조와 무관하지 않음을 믿는다.

1985년 경제기획원 통계

거창 32,790

강릉 161,634

백천 8,910

경주(강릉) 8,561

충주 1,120

금성(강원도 금화) 50

대한민국의 劉氏는 약22만명이다.

신미년(1991년) 정월

글 : 28세계 劉 次 鐘

파종별 내역 (派宗別 內譯)

1. 의사공파(義士公派) 15세손

휘(諱)는 명개(名蓋)자(字)는 현보(顯普) 가정무신(嘉靖戊申)서기 1548생이요, 만력정유(萬曆丁酉)서기 1579년 세상을 떠난 분 이다.

정유재란(丁酉再亂)때 안의황석산성(安義黃石山城)에서 순절(殉節)하신분으로 의사공이시다.

안의황암사(安義黃岩祠) 및 영남충의단(嶺南忠義壇)에 위패(位牌)를 봉안(奉安) 하여 매춘추(每春秋)향사(享祀)한다.

자손(子孫)은 전라북도, 함양, 김해, 거창등지에 살고 있다. 묘역(墓域)은 황산(黃山) 선영하(先塋下)

2. 정자공파(正字公派) 15세손 자손 산청, 순창, 함양, 거창

3. 교수공파(敎授公派) 16세손 자손 합천, 의령, 거창

4. 판사공파(判事公派) 20세손 자손 황해도 연안, 인천, 강화

5. 감정공파(監正公派) 17세손 자손 함양, 진주

6. 참봉공파(參奉公派) 13세손 자손 충청도, 영동, 금산, 거창

7. 통덕랑공파(通德郞公派) 13세손 자손 하동, 악양, 산청차황

8. 통정공파(通政公派) 12세손 자손 자손 전라도, 거창

9. 진사공파(進士公派) 12세손 자손 고성, 사천, 진주, 산청, 경주, 삼천포, 진양, 금릉

**********

묘사는 음력 10 월 10 일 지난 첫 일요일

순서

월영산 윗묘 20 세계 한웅 1709년 숙종 35년 생 내외분.

아래 22 세계 계종 1752년 영조 28년 생 할아버지 한분.

신기 윗묘 21 세계 인갑 1734년 영조 10년 생 내외분

아래 22 세계 월영산 아래 산소의 할머니 의성 김씨.

※ 이하 상세보는 생략함.

강릉유(江陵劉) 약사(略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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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유씨(江陵劉氏) 본관시조(本貫始祖) : 劉承備(유승비)

강릉유씨 시조의 휘는 承備(승비)이시고 초휘는 瑞(서)이시며 자는 天祥(천상)이시고 호는 菊齋(국재)이시다.

강릉유씨 본관시조께서는 중국 송(宋)나라 병부상서(兵部尙書)이시며 우리나라 유씨(劉氏)의 도시조(都始祖)이신 휘 (전) 할아버지의 9세손이시고, 문희공(文僖公) 휘 敞(창) 할아버지의 증조부(曾祖父)가 되신다.

공은 고려 원종(元宗) 14년 1273년에 강원도 우계현(羽溪縣)에서 송재공(松齋公) 휘 연(沿) 할아버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셨다.

공은 고려조(高麗朝)에서 여러번 관직을 역임하시다가 상서도성좌복야(尙書都省左僕射)에 오르셨으며 춘추 고령에 이르시어 벼슬에서 물러나시자 고려 충혜왕(高麗 忠惠王)께서는 공에게 *봉조하(奉朝賀)의 칭호를 내리시고 종신토록 나라에서 행하는 의식에 조복(朝服)을 입고 참여하라는 은전(恩典)이 베풀어졌으며 충정왕(忠定王) 3년 1350년 2월 2일에 서거(逝去)하시니 수(壽) 78세이셨다.

(자료출처 : 강릉유씨 홈페이지)

묘소는 개성부 남문(開城府 南門)밖 자좌원(子坐原)에 모시었고 시조(始祖) 할머니는 정부인(貞夫人) 옥구장씨(沃溝張氏)로서 개성부윤(開城府尹)이신 維(유)의 따님이시다. 

공은 일찍이 안향(安珦) 일명 안유(安裕), 호 회헌(晦軒), 시호 문성(文成)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으셨다.

안유(安裕) 선생은 원(元)나라에 가서 주자전서(朱子傳書)을 손수 베껴쓰시고 공자(孔子)와 주자(朱子)의 화상을 그려 가지고 귀국하여 고려말기의 유학진흥(儒學振興)에 큰 공적을 남긴 분이시다.

시조(始祖)께서는 동학인(同學人) 이제현(李齊賢)과 더불어 고려 충렬왕 34년 1408년에 원(元)나라 연경(燕京)에 건너가서 원나라의 거유명사(巨儒名師)로 유명했던 요수(姚燧), 염복(閻復), 조맹부(), 우집(虞集)등과 교우(交友)하여 그 학문이 더욱 심오(深奧)해졌으며 원(元)의 서책(書冊)과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를 상고(詳考)하여 연구 끝에 효행명(孝行銘)을 펴 내셨다.

시조께서는 조선왕조(朝鮮王朝)에 이르러 증손(曾孫) 敞(창)이 귀(貴)히 되시므로 인하여 순충보조공신(純忠補助功臣) 통정대부호조참의(通政大夫戶曹參議)에 추증(追贈)되시고, 공의 고조부(高祖父) 휘 贊(찬)께서는 사온령사헌부(司令司憲府) 대사헌(大司憲)에 증직(贈職)되셨다. (시조 할아버지의 벼슬이 좌복야(左僕射)정이품의 품계인데 증직을 정삼품의 벼슬인 통정대부를 증직함은 부합(符合)하지 않으므로 지난 94년 대동보 간행시 편위의 결의에서 증통정대부호조참의 증직함을 쓰지 않기로 한바 있다.)

공의 증조부(曾祖父)는 휘 昇(승)이신데 고려판전리사사(高麗判典理司事)를 지내시고, 공의 조부(祖父)께서는 휘 海(해)이신데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을 역임하셨다.

공의 아버지께서는 휘 沿(연)이신데 호는 松齋(송재)이시다. 고려조 때 가정대부홍문관집현전(嘉靖大夫弘文館集賢殿) 대제학(大提學)을 지내시고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의정령(領議政令)을 증직(贈職) 받으셨으며,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과 더불어 원나라에 건너가시어 모성급(模聖及) 72자상(子像)을 봉안(奉安)하여 현강릉(現江陵)에다 모시었다.

공의 어머니는 연안이씨(延安李氏)로서 호부시랑(戶部侍郞)승안(承顔)의 따님이시다.

장남이신 松栢(송백)은 고려때 봉익대부개성윤(奉翊大夫開城尹) 상호군(上護軍)을 지내시고 조선왕조에서 증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贈純忠積德秉義補助功臣)에 증직되시고, 차남 송단(松檀), 삼남 松節(송절) 두 할아버지는 무후(無後)하시고, 사남 송자(松梓) 할아버지는 금성군이시고, 松栢(송백)의 아드님 天鳳(천봉)은 고려조때 지안악군사(知安岳郡事)를 지내시고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을 증직받으셨다.

공의 묘소가 기록에는 남아있으나 그 흔적을 찾을 길 없어 항시 오매불망 해오다가 후손들이 뜻을 모아 시조께서 옛날에 살으셨던 강원도(江原道) 명주군(溟州郡) 옥계면(玉溪面) 현내리(縣內里)에 1988년에 공의 유적비(遺蹟碑)를 정성들여 세웠다.

명주(溟州)는 강릉(江陵)의 고호(古號)이며 옥계(玉溪)는 곧 옛날 우계현(羽溪縣)이다.

따라서 이곳은 공의 증손인 문희공(文僖公)이 훈봉(勳封)된 곳으로서 강릉유씨(江陵劉氏)의 득관지(得貫地)이기도 하다.

이곳에 세운 공의 유적비에 "시조(始祖) 할아버지의 유적비를 세우고 보니, 앞 뒷산에 푸른 소나무 우거지고 석벽에 흰 구름만 자욱하니, 칠백년의 긴세월이 흘렀건만 유풍(遺風)은 가시지않아 부노(父老)들의 예모(禮貌)는 고금(古今)과 같네, 후손들이 번창(繁昌)하니 복록(福祿)이 더욱 오래가리, 근원(根源)이 깊어서 그 흘러감이 더욱 빛나는 것은 공(公)을 알려고 할진데..." 라고 새겨진 비문(碑文)을 우리는 다같이 음미하고 또 새겨서 이를 영원히 간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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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유씨(江陵劉氏) 중시조(中始祖) ; 劉敞(유창)

공의 휘는 敞(창)이요 자는 太和(태화)이시고 초휘는 敬(경)이시며 처음자는 孟儀(맹의)이신데 호는 仙菴(선암)이요 시호는 文僖(문희)이시다.

공은 강원도(江原道) 강릉부(江陵府) 우계현(羽溪縣)에서 고려조 공민왕 원년 1352년에 天鳳(천봉)의 큰 아드님으로 태어나시었다.

공은 우리나라 유씨의 도시조이신 (유전) 할아버지의 12세손이시고 공의 증조부는 강릉유씨의 시조이신 휘 承備(승비)이시고 공의 조부는 휘 松栢(송백)이시며 공의 아버지는 휘 天鳳(천봉)이시다.

공의 나이 어려서부터 범인(凡人)과는 달리 지각이 뛰어나시어 5세에 글 붙임을 잘 하셨다. 어려서 전야은(田隱)선생으로부터 글을 배우셨는데 공의 글 푸는 것을 보시고 장차 큰 인물이 될 소년이라고 크게 감탄하시었다.

공의 성품(性品)과 용모가 준수(俊秀)하고 또 덕기(德氣)가 크게 이루어졌으며 재능(才能)과 기예(技藝)에도 능하셨을 뿐만 아니라 7, 8세에 말을 하면 언행이 단정(端正)하고 민첩하였으며, 공은 지략이 뛰어나시어 군동(群童)을 말과 규율로서 지배하여 스스로 따르게 하였으니 보는 사람마다 "비범한 사람이다." 라고 하였다.

공의 나이 15세에 포은(圃隱), 목은(牧隱) 두 선생의 제자가 되시어 대학(大學)을 배우실 때 사물을 식별하고 관찰하는 능력이 탁월하시어 마치 물같이 맑고 산같이 높으며, 옥같이 순수하고 금같이 빛나니 사람들이 공의 인상(人相)만 보고도 그 이면(裏面)을 짐작하게 되었다.

포은선생께서는 공의 강론(講論)함을 보시고 매우 뛰어난 지사(志士)라고 하시면서 "앞으로 큰일을 할 능력있는 사람은 바로 유씨(劉氏)집에 있다." 라고 하였고, 16세 되시던 해에는 목은 이선생(李先生)으로부터 배우셨는데 선생이 말씀하기를 "나한테 배우는 문도(門徒)가 팔십여인(八十余人)이 넘으나 그 중에서 劉敞(유창)만이 행동거지가 남보다 뛰어나고, 오경(五經)을 수업할 때에는 무릎을 꿇고 책을 대하면 칙천지명유시유기(勅天之命維時維幾) 여덟글자를 때로는 소리를 높이기도 하고 낮추기도 하여 또 길게 느리게 읽으니 공의 동문생(同門生)들은 손가락질하며 웃었다. 그러나 공은 시종일관(始終一貫) 열심히 배우고 익혀서 학문을 통달(通達)하였다." 라고 말씀하셨다.

공이 17세(1368년)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고려 공민왕(恭愍王) 20년(1371년) 공의 나이 20세 되시던 해에 금잠방(金潛榜) 내과(內科)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시었다. 이때 목은선생이 공시관(貢試官)이었는데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과연 유창은 글을 겉만 읽지 않고 그 뜻을 음미하여 새기더니 오늘과 같은 영광이 있도다." 라고 칭찬하셨다.

공은 명문(名門)의 후손으로서 소년문사(少年文士)로서 그 명성(名聲)이 빛났으나 이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오직 열의(熱意)와 성의(誠意)로서 학문에만 뜻을 두셨다.

공민왕 22년(1373년1월24일)에는 판진덕박사(判進德博士)에 이르시고 동년 12월 28일에 판순유박사(判諄諭博士)가 되시다.

그런데 고려는 고려태조(高麗太祖)가 나라를 세운지 500년 역사가 되었으나 공민왕에 이르어서 그 슬하에 아들이 없고 또한 공민왕께서 갑자기 서거하시니 권신(權臣)들이 권세를 부려 자신들이 요승신돈(妖僧辛旽)의 아들 우(禑)를 공민왕의 아들이라 거짓 일컬어서 왕위에 추대(推戴)되었으나 해가 바뀔수록 황음무도(荒淫無道)하고 백성들을 함부로 극형(極刑)으로 다스리니 그 원성이 높았다.

한편 80년간 몽고의 지배를 받았던 북방국경지대가 약탈을 당하던 고려는 말엽에 이르러 원나라 세력이 쇠약해지자 반원(反元)정책을 세우고 지금의 북청지방(北靑地方)을 수복시키고 서북계(西北界)로 침입한 홍건적(紅巾賊)을 평정시켰으나 왜구(倭寇)가 1350년부터 약 40년간을 출몰(出沒)하여 나라를 괴롭혔다.

이때 공은 공민왕 23년(1374년6월25일) 판성균박사(判成均博士)에 이르시고 우왕원년(禑王元年:1375년4월 25일) 판문하주서(判門下注書)로 우왕2년(1376년1월21일)에 비선덕랑통례지후(批宣德郞通禮祗候)에 이르시고 동년 9월3일에 판랑장(判郞將)이 되셨다.

우왕7년(1381년3월13일)에 판겸순유박사(判兼諄諭博士)에 이르시고 우왕8년(1382년9월9일)에 비승봉랑사설서령(批承奉郞司設署令)에 제수(除授)되시고 우왕11년(1385년12월27일)에 비승봉랑전의주부(批承奉郞典儀主簿)가 되시다. 우왕13년(1387년8월9일)에 비승봉전좌랑(批承奉典佐郞)에 이르시고 우왕14년(1388년6월19일)에 비조봉랑전교시승겸성균박사(批朝奉郞典校寺丞兼成均博士)에 제수되시고 동년 6월29일에 비통직랑예의정랑겸성균박사(批通直郞禮儀正郞兼成均博士)에 이르시었다.

이때의 나라사정은 조정신하들 사이에 친명파(親明派)와 친원파(親元派)가 대립하여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어 고려조의 국운(國運)은 이미 기울어졌고 민심 또한 려조(麗朝)를 떠난 상태에 있을 때(1388년) 이성계가 요양원정중(遼陽遠征中)에 압록강(鴨綠江)에서 회군하고 1389년 왜구의 토벌(討伐)에 큰 공을 세워 친명파에 거두(巨頭)가 되어 부패한 구제개혁(舊制改革)을 단행하기 위하여 공사전적(公私田籍)를 소각(燒却)하고 과전법(科田法:토지제도를 경기와 외방으로 구분하여 경기 가운데서 과전을 지급하고 외방으로는 군전, 공신전, 공전 등 문종 때 실시하던 토지제도에 돌아감을 원칙으로 함)을 공양왕 4년(1391년)에 실시하니 그 결과는 려조(麗朝)의 종말을 고하는 한편 이씨조선(李氏朝鮮)을 창업하는데 경제적 기초가 되었다.

이때 공은 우왕15년(1388년8월15일)에 비군부정랑(批軍簿正郞)이 동년 10월6일에 성균사예예문관직제학(成均司藝藝文館直提學)에 오르시고 공민왕2년(1390년4월24일)에 성균사예보문각직제학(成均司藝寶文閣直提學)이 되시고 공민왕3년(1391년9월15일)에 성균제주보문각직제학(成均祭酒寶文閣直提學)이 되시었다.

평소 공은 이성계와 더불어 유도학술(孺道學術)을 중히 여기시니 경서(經書)와 사서(史書) 및 제자제시문집(諸子諸詩文集)을 논하며 창업(創業)하기전 집에 있을 때는 항시 공과 더불어 글을 읽으시었다.

고려 34대왕 공양왕4년(1392년6월)에 왕은 이성계사저(李成桂私邸)에 행행(幸行)하여 술자리를 베풀고 이성계와 더불어 맹약(盟約)할 때 시중배극염(侍中裵克廉) 등이 왕대비(王大妃)에게 말씀드리되 "이제 공양왕이 정치에 어두워서 군주의 도를 실추(失墜)하였고 생영(生靈)들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라고 폐위시키기를 주청(奏請)하니 왕대비께서 이를 받아들이어 폐위의 교명(敎命)을 문하평리(門下評理) 정희계(鄭熙啓)에게 주어 선포하니 공양왕(恭讓王)이 고개 숙이고 엎드려 교명을 듣고 "내가 본래 군주가 되고 싶지는 않았는데 군신(群臣)들이 강립(强立) 시켰으며 나의 성격이 불민(不敏)하였기 때문에 사기(事機)를 알지 못하였으니 어찌 신하들의 뜻에 어긋남이 없으리오." 라고 말하면서 흐느끼며 눈물짓고 원주(原州) 땅으로 떠났다.

이에 백관(百官)들이 국새(國璽)를 왕대비전에 올리고 모든 국무를 왕대비에게 주품(奏稟)하니 왕대비께서는 이성계에게 나라 일을 책임(責任)지우고 전위(傳位)하는 교명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태조(太祖)가1392년 7월17일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동월28일 유창(劉敞) 외 49명의 대소신료(大小臣僚)와 현직에 있지 아니한 노소백성(老小百姓)들이 옥새를 받들고 이성계 저택에 나아가니 인파가 마을 앞까지 메웠었다. 이에 성계는 "천명(天命)과 인심을 쫓아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대의에서 그대들의 뜻을 수렴하노라." 하고 과인(寡人)을 추대(推戴)하여 대업을 이룩한 그 공이 크니 황하(黃河)가 띠와 같이 좁아지고 태산(泰山)이 숫돌과 같이 작아져도 국토는 멸망하지 아니 한다는 맹세를 잊을 수가 없으며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 유창 외 십명(十名)이 모의(慕議)에 참여하여 과인을 추대한 그 공(功)이 또한 컸으며 승지(承旨) 안경태(安景泰) 외 15명은 고려에서 정치변란(政治變亂)의 와중에서도 뜻을 과인에게 두어서 그 공을 포상할만한 지라 이상 사람들에게 공의 순서대로 공신의 호를 주게되어 1등공신 18명, 2등공신 12명, 3등공신 18명, 모두 개국공신(開國功臣)은 48명이 되노라 하시었다.

그때 공은 2등공신이 되시고 그해 7월에는 중정대부성균제주세자우보덕(中正大夫成均祭酒世子右輔德)에 오르시고 동년 10월9일에는 통정대부성균대사성직수문전(通政大夫成均大司成直修文殿)에 오르셨다. 이태조께서는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공을 시켜 강론케 하셨으며 수시로 대학(大學)을 강론케 하셨다.

1393년 9월2일에는 시과방문(試科榜文)을 붙이고 과목(科目)을 궁전에 계시하고 성균대사성 유창으로 고시관(考試官)을 임명하여 구십구인을 선발하니 상감(上監)도 삼인을 선발하셨다. 이를 삼전시복(三殿施福)이라고 한다.

1393년 11월 공이 상감 앞에 나아가서 아뢰기를 "신이 높은 벼슬에 있으나 국가에는 별 도움이 없이 국록(國祿)만 축낼까 두려우니 원컨대 본직에서 물러나 신선의 도나 배울까 합니다." 하니 태조께서 말씀하시기를 "짐이 한고조가 아닌데 그대가 어찌 장자방(張子房)이 된다는 말인가! 그대가 장자방의 뜻을 아는가 장자방은 비록 신선(神仙)을 따라 놀겠다고 했으나 국가의 중대사(重大事)에 필연코 보필했으니 그대도 물러날망정 나를 보필하는 것을 잊지 말지어다." 하시며 선암(仙菴)의 호(號)를 하사(下賜)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너와 내가 만난지 오래며 친분 또한 두터웁거늘 갑자기 내곁을 떠난다고 하면 사람들이 말하되 임금을 버렸다고 할것이니 불충이 되고 신선을 배운다고 어버이를 버린다면 또한 불효가 될 것인데 그래도 좋은가!" 라고 하시니 공이 휴퇴(休退)할 뜻을 버리셨다

1395년 5월에 공(公)으로 세자우빈객(世子右賓客)을 삼았으며 동년 8월14일에 도평의사사보문각학사(都評議使司寶文閣學士)가 되시고 1396년 1월17일에는 자헌대부옥성군(資憲大夫玉城君)에 오르시고 동년 4월20일에는 보문각학사겸예조전서(寶文閣學士兼禮曹典書)가 되셨다. 공은 태조 때 열두번 승진하시었다.

태종(太宗) 원년(1401년윤3월1일) 자헌대부옥천군(資憲大夫玉川君)에 봉작되시고 동년 10월에는 국자감생(國子監生)이 되시어 말 일천필(一阡匹)을 중국에 보내고 와서 시집(詩集)을 의정부(議政府)에 요구했다.

의정부에서는 이 일을 상감께 알리고 예문관의 관원들과 문신들이 사운시(四韻詩)와 장편시(長篇詩)를 지어 시축(詩軸)를 만들어 공에게 주었다. 공이 송별연을 받고 상감에게 작별을 고하고 말 오천필을 가지고 중국으로 가셨다. 동년 12월에 승영부윤(承寧府尹)이 되시고 1402년 7월22일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에 오르시고 1404년 2월에는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오르시었다. 1405년에는 세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을 역임하셨다.

1407년 태종대왕(太宗大王)이 경복궁에서 잔치를 베풀고 좌명공신(佐命功臣)이 극히 많으나 공에게만 "공심일시(公心一視)" 네글자(御筆)를 하사 하시었다.

1408년 6월에는 도감도제조(都監都提調:태조장례총책임자)로 선임되셨다. 1408년 5월24일에 태조대왕이 승하하셨다. 1410년 4월10일에 길주도찰리사(吉州道察理使)로 제수되시고 건원능(健元陵:태조묘)을 2년이나 지켰으므로 의복 한벌과 사모(紗帽:가죽신과 완장지운말)를 하사 받으셨다. 그리고 공에게 3년간 능묘를 지킬 것을 명하시었다. 동년 8월에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使)에 임명되시었다.

1411년 공께서는 동방(東方)은 목(木)이라 회색(灰色)옷을 금하여야 한다는 말을 하시고 왕씨(王氏)가 망할 때는 사람마다 비둘기 색깔이 될 것이다 하더라 과연 그 말이 맞다고 하륜(河崙)은 감탄하였다.

1412년 6월에 사도감(四都監)을 신설하였는데 상복도감(喪腹都監), 빈전도감(賓殿都監), 국장도감(國葬都監), 제도감(齊都監)을 두었는데 공으로 하여금 국장도감을 삼았다.

동년 12월에 공을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 높이셨으며 1413년 8월에는 세자이사(世子貳師)를 삼고 1415년 6월에 전국에 혹심한 가뭄이 들어 국가에서는 여러 방면으로 비오기를 빌었으나 더욱더 온땅이 말라만 갔다. 이때 공께서는 상감께 아뢰기를 개경사(開慶寺)에 가서 비오기를 빌라고 하여 제를 지냈다. 동년에 공에게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을 봉하시었다.

1417년에는 공으로 하여금 원주각림사(原州覺林寺)에 가서 화최경완판식(華最經完版式)을 갖게하고 간행(刊行)을 축하하는 축하식을 갖게 하사었다.

1418년 5월에는 어주(御酒)인 약주(藥酒)를 하사(下賜)받으셨다. 태종대왕 때는 34번 승진하시었으며 동년 6월8일 추충협찬개국공신(推忠協贊開國功臣)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 세자이사(世子貳師)를 지내시었다. 동년 6월에 세자(世子) 양영대군(讓寧大君)을 폐출하여 광주(廣州)로 추방하고 충녕대군(忠寧大君)으로 세자를 삼았다.

세종3년(1421년1월19일)에 세종대왕(世宗大王)께서 자기의 스승인 공에게 노인을 특별히 우대하는 뜻에서 궤장(杖:안석과 지팡이)을 하사하시었다. 세종3년 12월9일에 공께서 서거하시니 향년(享年) 69세이셨다.

부음(訃音)을 전해 들으신 세종대왕께서 크게 슬퍼하시고 백관들과 같이 삼일동안 조회(朝會)를 멈추고 슬피 울면서 칠일동안 소찬(素饌:고기를 먹지 않음)하시고 근신 자헌대부 금영렬(近臣 資憲大夫 金英烈)로 칙조사(勅弔使)를 삼아 칙명(勅命)하시기를 장지(葬地)로는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 해천리 우록(右麓) 임자원(壬子原) 현 서울시 강동구 상일동 190번지에 안장(安葬)케 하시고 미두오십석(米豆五拾石)을 보내시어 일등공신의 예(禮)로서 후장케 하시고 시호(諡號)를 文僖(문희)라고 내리셨다.(註: 勤學好問小心畏忌:근학호문소심외기)

열심히 배우고 알려고 노력하는 것이 "文(문)" 이고, 마음을 항상 삼가고 매사를 주의 깊게 조심하는 것을 "僖(희)" 라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을 증(贈)하시고 부조묘(不조廟- 나라에 큰일을 하고 애쓴 사람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를 명하시었으며 그 후손에게는 음록(蔭祿)을 내리시고 조세와 부역(賦役)을 면제케 하시었다. 그해 12월 기사일(己巳日)에 태상왕(太上王) 정종(定宗)께서 별도로 제물을 헌관(獻官)에게 보내어 치제(致祭)케하시었다.

할머니 광주이씨(廣州李氏)는 1353년에 출생하시어 1415년 6월10일에 돌아가시니 향년(享年) 59세이셨다. 세종대왕께서는 진한국부인(辰韓國夫人)을 봉(封)하시니 "遁村(둔촌)" 휘 "集(집)"의 따님이셨다.

그묘를 잘 수호케 하기 위하여 비갈(碑碣)을 세웠으니 동원군(東原君) 함전림(咸傳林:태조 개국3등공신이며 시인이다. 시호는 平定임)이 그 비(碑)에 제자(題字)하기를 "유명조선(有明朝鮮) 개국공신(開國功臣)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 증영의정(贈領議政) 문희공(文僖公) 유창지묘(劉敞之墓)" 라 하고 배(配)에는 진한국부인(辰韓國夫人) 광주이씨(廣州李氏) 부우(附右)라 하였다. 묘하(墓下)에는 묘비(墓碑), 상석(床石), 장군석(將軍石), 장명등(長明燈), 망주석(望柱石), 곡장(曲墻)이 있으며 신도비(神道碑)와 묘갈명비(墓碣銘碑)가 있다.

공의 시문(詩文)이나 익장(謚狀:임금이 시호를 내리면서 글로 그 뜻을 새긴 원본), 치제문(致祭文), 묘포(墓表), 갈명(碣銘)은 원본을 인출해서 연안(延安)종손집 사당(祠堂)에 보존하고 대대로 음록을 받으면서 불조묘(不廟)에 향사(享祀)하였다. 공의 화상영정(畵像影幀) 및 태종어필(太宗御筆) 공심일시(公心一視)는 차자인 仁悌(인제)가 대대로 지켜오고 훈고맹권(勳誥盟卷)은 5세손인 世(세분)이 지금까지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여러차례 병화(兵火)로 인하여 문헌(文獻)이 모두 없어졌으나 다행히도 사당, 어필, 영정, 훈고맹권 만은 보존되어 있다.

공의 도와 덕을 숭모(崇慕)하기 위하여 사림(士林)과 유림(儒林)이 다투어 힘을 모아 선생의 사우(祠宇)를 전국각지에 세웠으니, 전남 장성(長城)에 송계서원(松溪書院), 승주 월등(昇州月燈)에 월계사(月溪祠)와 전북 고창 고수(高敞古水)에 조산사(造山祠), 무장(茂長)에 덕산단(德山壇)을 세우고, 경북 칠곡(漆谷)에 숭양재(崇陽齋), 충북 영춘(永春)에 용계사(龍溪祠)를 강원 영월(寧越)에 흥현사(興賢祠)와 함경 북청(咸鏡北靑)에 안덕사(安德祠)를 세워서 선생을 배향(配享)하고 춘추로 향사(享祀)하고 있다.

공의 실기(實記)로는 선암집이책(僊菴集二冊-하버드 박물관 소장)과 공의 친필(親筆)과 왕조실록(王朝實錄)에 나타난 공의 기록(記錄)과 시(詩) 몇 수가 남아 있을 뿐 그밖에 것은 모두 유실(遺失)되어 지금까지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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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유씨(江陵劉氏) 병조판서공(兵曹判書公) ; 劉治(유치)

공의 휘는 治(치: 致라고도 하였음)요, 호는 靑遊(청유)이신데 강원도 강릉부 우계현에서 天鳳(천봉)의 4남으로 출생하시었다.

우리나라 유씨의 도시조이신 죽간공(竹諫公) (유전)께서 공의 11대조이시고 강릉유씨 시조이신 承備(승비)께서는 공의 증조부이시며 고려조에서 봉익대부개성윤상호군(奉翊大夫開城尹上護軍)을 지내시고 조선에서 증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贈純忠積德秉義補助功臣)이신 휘 松栢(송백)께서는 공의 조부이시고 고려에서 안악군사(安岳郡事)를 지내시고 조선에서 증충근익대수의협찬보조공신(贈忠勤翊戴守義協贊補助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補國崇祿大夫) 의정부우의정령경연정판병조사(議政府右議政領經筵判兵曹事)를 지내신 휘 天鳳(천봉)께서는 공의 부친이시다.

공은 어려서부터 총민(聰敏)하시고 10세 때부터 경사(經史)를 능히 통달하시니 장형(長兄)인 문희공(文僖公)께서 사랑하여 가르치시되 "우리 가문을 크게 빛낼 동생이다" 라고 항상 칭찬하셨다.

성장해서 문희공 장형을 따라 정포은(鄭圃隱) 선생님을 찾아가니 선생께서 말씀하시되 "그 기상(氣象)이 훌륭하며 재능이 뛰어남을 보시고 과거(科擧)공부를 하라."고 권하니 공이 사양(辭讓)하되 "근세(近世)에 선비들의 풍조(風潮)가 퇴폐(頹廢)해저서 대관의 자제들이 실지(實地)를 힘쓰지 아니하고 외화(外畵)만을 숭상(崇尙)하여 시(詩) 한수 지어 읊은 것으로 젊어서 이름내는 빠른 길을 택함으로서, 요새 홍분방(紅粉榜:계집의 분단장)처럼 겉치장만 하는 방목(榜目)이라는 비웃음을 받으니 이 어찌 선비들의 수치(羞恥)가 아니겠습니까!

선비가 모름지기 경학(經學)에만 힘쓴다면 과거(科擧)는 저절로 그 가운데 있는 법이라 끝을 취하고 근본(根本)을 버릴 것이 아니오니 원컨데 선인을 배우는 근기(根基)가 무엇을 먼저 해야 된다는 것을 듣고자 합니다." 하니 선생이 크게 기특히 여기시고 이에 소학(小學)의 쇄소응대(灑掃應對)하는 절차와 나아가서는 대학(大學)의 수제치평(修齊治平)의 도(道)를 가르치시니 공이 차분한 마음으로 강구(講究)하여 그 요령을 얻었다.

공의 나이 15세에 큰 선비의 지취(旨趣)가 있었으며 20여세에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집에 장가 드시니, 호 陽村(양촌) 자 權近(권근)과 호 梅軒(매헌) 자 權遇(권우:두분 다 시인) 이두분과의 인척관계가 되었음으로 강론(講論)하는 법이 치심수신(治心修身)하는 도에 벗어나지 아니하고, 또 변계량(卞季良) 호 春亭(춘정), 변중량(卞仲良) 호 春堂(춘당) 형제와 더불어 옳은 친구를 삼았으므로 30세안에 시(詩)에 대한 조예(造詣)가 놓아졌다.

세상사람들이 공을 가리켜 칭찬하기를 "유씨(劉氏)집안 형제들은 경술(經術)과 문장(文章)이 서로 비슷하다." 하였다. 그러나 위로 삼형제는 등과(登科)하여 국가에 공헌(貢獻)하고 또한 가문(家門)을 빛내고 있으나 막내아들만 벼슬에 오르지 않는 것을 부친께서 매우 한탄(恨歎)하시니 공이 할수 없이 뜻을 굽혀 부친의 마음을 어기지 아니하려고 과거에 응했던 것이 장원급제(壯元及第)하였다. 그리하여 곡강(曲江:경북 영일군 흥해읍의 옛이름)에서 잔치할 제 목은(牧隱) 李穡(이색), 하정(夏亭) 柳寬(유관), 기우(騎牛) 李行(이행) 세분들이 찾아와서 축하하되 "그대 형제들은 그 누구라도 당할 수 없도다. 사람수로는 순씨(荀氏)의 팔형제만 못하지만 부귀로는 석분(石奮)의 만석군(萬石君)에 비하리요! 이제 자랑할만한 집은 유씨가문(劉氏家門) 뿐이다." 라고 하였다.

얼마 아니 되어서 부친상(父親喪)을 당하고 또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지자 공은 출세할 뜻이 없어서 십년간을 숨어 살면서 불사이성(不事二姓)의 의리를 지켰다.

태조 이성계가 등극하여 어진 인재(人材)를 구하는 데에 온갖 힘을 다하였으며 임이 사귀던 제현(諸賢)들이 모두 조정(朝廷)에 올라 좌우(左右)로 들어 앉아서 호소(呼訴)하고 끌어 당기면서 공을 놓지 않으려는 것이다. 공의 큰 형(劉敞)이 태조의 예빙(禮聘)에 감격하여 개국공신(開國功臣)이 도고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에 봉작(封爵)되었으며 부(父) 조(祖) 이상(以上)이 증직(贈職)을 받으니 공 또한 의리상(義理上) 사양할 수 없어 벼슬에 나아갔다.

태조(太祖)께서는 공을 정헌대부병조판서(正憲大夫兵曹判書) 예문관대제학(禮文館大提學)의 직첩(職牒)을 내리시니 사양하며 받으셨다. 그후 1393년에 정구(鄭矩)의 농간으로 공의 선산(先山)인 양주군(楊州郡) 동구용산(東九龍山)에 계시는 부친 天鳳(천봉) 산소와 백형(伯兄) 사후 신후지지(身後之地)로 정한 유댁(幽宅)을 태조 이성계에게 능지(陵地)로 채정(採定)하여 부당히 빼앗기자 이 일을 분히 여겨 벼슬도 버리시고, 1401년에 청유작(靑遊作) 삭발도진세존염표장부(削髮逃塵世存髥表丈夫: 머리 깎고 진세를 피히여 장삼을 입었으나 수염을 둔 것은 장부의 마음을 표시함이라.) 청류작 오행시를 남기시고 태종(太宗)을 피하여 북청(北靑)으로 가서 은신하셨다.

공이 북청으로 가신 까닭은 옛 친구 양렬공(襄烈公) 이지란(李芝蘭)과는 의형제(義兄弟)를 맺은 사이였으므로 이지란을 찾아서 북청으로 은거하기 위하여 떠나셨던 것이다.

이지란을 소개하면 이공(李公)은 1331년 충혜왕(忠惠王) 1년 출생 본성(本姓)은 동씨(氏)였는데 태조가 성을 이씨(李氏)로 사성(賜姓)했다. 자는 식형(式馨) 익호는 양렬(襄烈) 원(元)나라 말기에 그 일당을 이끌고 투항(投降)하여 북청에 있다가 이성계 휘하에 들어가서 공양왕 4년에 지문하부사판도평의사사(知門下府事判都評議使司)를 지내고 이성계를 도와 정사좌명공신(定社左命功臣)이 되어 명(明)나라를 도와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하여 청해백(淸海伯)에 피봉(皮封)되었다.

공이 가족을 이끌고 북청에 와서 마을터를 선택한 것이 별안대(別棧臺)였다. 그러나 그 지방이 본래에 숙신(肅愼)의 옛 서울이요, 말갈(靺鞨)의 고을이라서 되놈의 풍속(風俗) 그대로였다. 지방민들이 오로지 활쏘기 말달리기만 숭상할 뿐 예의(禮儀)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교육과 혼상(婚喪)에 법도와 예의가 없었다.

공께서는 이것을 바로잡고 싶으나 고을 설립(設立)도 미비(未備)하고 관(館), 장(場) 학교도 없어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공이 드디어 개탄한 나머지 이웃에 사는 청해군(淸海君) 이지란과 상의하되 "이곳 국민들이 짐승처럼 되어 있는 것을 어찌 앉아서 보고만 있겠는가!" 청해군이 대답하기를 "나는 무인(武人)이라 병법(兵法)만 알지 학문에는 소범하오니 예절을 가르치는 방법은 공이 책임(責任)지소서" 하였다. 공이 드디어 마을 늙은이들과 상의하여 서재(書齋)를 건립하고 수제 십여인(十余人)을 구하여 가르쳤다. 그로 인하여 배워가는 길이 밝아지고 점점 학문을 읽혀가니 상례(喪禮)와 제례(祭禮)에 불교(佛敎)의 예를 쓰지 않고 혼인에도 납폐(納弊)의 예를 행하니 이웃 고을에서도 또한 많은 사람이 이를 본받았다. 북쪽지방에 문학과 예절이 있는 것은 대개 공으로부터 시초가 된 것이다.

공이 1422년 8월9일에 서거하시니 세종4년(世宗四年)이었다. 묘소는 북청부남이십리(北靑府南二十里) 량가사(良可社) 별안대(別安臺) 금동곡(金童谷) 해좌원(亥坐原)인데 배위(配位)이신 정경부인안동권씨(貞敬夫人安東權氏)는 진사(進士) 윤보(允保)의 따님이신데 공과 같이 합장했다. 슬하(膝下)에 6남을 두셨으니 장남은 仁夫(인부)인데 삼척진수군첨절제사(三陟鎭水軍僉節制使)요, 차남은 仁秀(인수)인데 성균관진사내선전관승점마어사(成均進士內宣傳官升點馬御使)요, 삼남에 仁德(인덕)은 가선대부예조참판겸오위도총부부총관(嘉善大夫禮曹參判兼五衛都總府副總官)이요, 사남에 仁奉(인봉)은 충의교위좌군사직(忠毅校尉左軍司直)이요, 오남에 仁智(인지)인데 진사호조정랑(進士戶曹正郞)이요 육남에 仁好(인호)는 의장고사직(義長庫司直)이시다.

공의 강직(剛直)한 충절(忠節)과 예의 도덕을 숭모하여 1619년 봄에 공의 묘하(墓下)에 사우(祠宇)를 짓고 안덕사(安德祠)로 명명하여 춘추로 정일(丁日)을 택하여 그곳 유림(儒林)들이 향사(享祀)하여 왔으며 충북 단양 영춘()에도 유림들이 사우를 세워 용계사(龍溪祠)라고 이름짓고 매년 춘추로 정일(丁日)을 받아서 향사하여 왔으나 1868년 대원군의 서원(書院) 철폐령(撤廢令)으로 훼철(毁撤)당하고 다시 복원하지 못했으며 지금은 북한 땅에, 일부는 우리 남한에 빈터만 남아있어 궐향(闕享)하고 있으니 매우 슬프게 생각하는 바이다.

우리 江陵 劉씨의 始祖인 劉 筌의 墓所는 경북 영천군 영천읍 녹전리에 위치하고있는바 이곳에 세워진 墓碑의 墓碑銘 내용을보면 始祖할아버지의 行績을 잘 알 수 있어 여기에 소개한다.

※ 행 적 의 기 록 (行 跡 의 記 錄) ※

선생의 諱는 筌이요, 字는 원보요, 號는 죽간이요, 姓은 劉씨요 벼슬은 正憲大夫 兵部尙書요,彭城人이시니 漢 太祖의 40대 孫이라.

曾祖의 諱는 宗이니 벼슬이 翰林이요 組의 諱는 迪이니 벼슬이 吏部尙書요 父의 諱는 采 이니 벼슬이 金紫光綠大夫라.

先生이 宋나라 仁宗 辛卯 4월 8일에 出生하셨는데 稟性이 剛穀 正直하시고 學殖과 度量이 깊고 넓으시어 서적이라곤 通達하지 않함이 없이 九經百家 및 天文地誌 馥筮醫學을 모두 硏究識得 하였기로 世人들이 經國濟世할만한 人才라고 擧稱하였다.

集賢殿에서 大樂을 제정할 때 임금이 中貴人(宦臣)으로하여금 참관하게하니 선생께서 이를 諫爭하여 참관을 못하도록 하였고 공어사(덕수)는 諫하다가 벼슬에서 떨어졌다. 선생이 極諫하여 가로되 中書(궁중에서 초서를 맡은관서)의 宦官이 直言을 排斥하는 理由는 陛下의 聖明하심을 흐리게하고 천하 사람들의 입을 다물게 하려는 것 이다 하였다.

天禧年間에 政堂論爭이 편당적으로 일어나자 선생께서 퇴근길에 한 친료에게 서한을 보내 가로되 “소인들의 狡猾함은 죄과가 없는 듯이 감추고 군자의 偏僻함은 瑕疵가 있는것만 같으니 罪過가없는 小人들은 寬容하고 瑕疵가있는 君子를 내침이 어찌 識見이 있는자가 할 일인가?”라고 하셨다. 그때 奸臣들이 黨을지으니 고운 비단에 파리똥같이 聖政에 汚點이생기고 또 靑苗法(벼가 익기전에 조세를 부과하는 법)이라는 新法으로서 生老病死의 苦가 생긴다는 말이 있었다. 선생께서 이를 직도로 反對 했으나 容納지 아니함으로서 이에 同志 七學士 임팔급 설인검 허중 송규 최와 권지기 공덕수와 배를타고 바다를 건너 東國으로 나와 처음 杞溪(경주속읍)에 居住하시다가 그뒤에 東居郡(永川)으로 移居 하였으니 즉 高麗 文宗때라. 浮海小序에 詩가 있으니 그 시에가로되 “이내몸 한번 고려에 온뒤로 어찌하여 故國愁心 잊어버리랴. 그리운 우리임금 언제봤던고 보고파 쏟는 눈물 금할수 없어라.” 하였고 穗送坮記와 詩가 있으니 그 시에 가로되 “쓸쓸한 가을날 수송대에 올라 내 시름 멀리 고국으로 보내노라. 그러나 어느곳이 중국땅인지 사람들은 아쉬움을 몰라 주노라.”하였고 또 自警詩가 있으니 “ 道德을 지키면 가난도 좋고 글월을 대하니 世俗과는 멀어지네 이마음 굳이 잡아놓지 않으면 그제야 本性이 돌아오리라.” 하였다. 이 세수의 시만 보더라도 선생의 學文이 어떻하다는것과 임금을 사랑하는 忠心을 가히 알 수 가 있다. 선생이 慨然히 異端을 排斥하고 儒道를 밝힘으로써 自身의 責任으로 여기고 글집을 건설하여 禮樂을 振興시키는데 급급하시니 朝野가 모두 흡족이 여기고 冊을 가지고 와 學業을 익히는 者 千數이라. 晩年에야 임금님의 徵召에 應하여 聖治를 補導함으로써 美風을 남은 대중속에서 다시보게 되었으니 이는 실로 하늘이 哲人을 中國에 태여내고 그로하여금 聖道를 高麗에 펴어 三韓의 舊習을 씻어내고 오래도록 끊겼던 실마리를 다시 이어가도록 한 것이니 어찌 거룩하지 아니한가?

先生께서 壬寅이월초칠일에 卒하셨으니 享年72세라. 配에 ?西 李씨는 貞敬夫人을 受封했고 己未모월에 出生하여 癸酉유월칠일에 卒하셨으니 墓는영양군(영천고호)명산면 화지동 亥座에 상하봉으로 되었다. 아들 셋을 두었으니 長男 賢規는 벼슬이 平章事로 居陀君을 受封했고 次男 堅矩는 匡靖大夫大司憲이요, 三男 堅益은 벼슬이 奉翊大夫大司憲이다.

현규의 子 春茂는 벼슬이 文林郞으로 三司를 追封했다. 춘무의 子 成은 벼슬이 樞密副使崇綠大夫요, 견구의 子 雄悅은 崇綠大夫로 娥林君을 受封했고, 견익의 子 咸은 벼슬이 安岳郡事左僕射라. 曾孫 玄 孫이하는 많아서 記錄하지 않았노라.

아! 先生께서 東으로 朝鮮에 건너오셔서 그 높으신 功勳과 충열과 德望과 行儉이 國家의 담틀이요, 士林의 領袖이라. 충열왕때 諡號를 文樣이라 하고 특히 國家의 優典이 있었으며 平章事 조자기가 그의 神道碑文을 지어 성덕을 誇示하였고 그뒤에 열성조의 賢臣 翰林學士 계장수, 대제학 박의충, 대사성이문청, 서장관 홍사범, 대제학 박상의 등이 各各 疎帳을 올려 가로되 “文樣公 劉筌은 東方理學의 祖宗으로서 그 勳德이 옛적 周公, 召公, 太公에 比喩한다 해도 오히려 竝列할만 한데 崇奉하는데 있어서는 아직까지 祠宇가 없으니 어찌 臣들의 부끄러운바가 아니리요” 라고 하였다.

임금의 特命으로 禮官이 慰靈祭를 行하고 開城府에 祠堂을 建立하여 영원히 英靈을 편히 모시고 또 崇義殿에 配享하여 國家와 더불어 함께 빛나게하고 田土와 奴僕을 下賜하여 尊奉함으로써 그 功德에 報答 하였다. 슬프도다. 桑田이 碧海로 一變할제 여러번 變亂을 껵고 後孫들이 孱弱하여 짐으로 墳墓를 失傳한지 삼사백년이려니 어찌나 다행하게도 하늘이 도웁고 선령이 복을 내려주심인지 後孫 응상이 墓는 찾았으나 誌石은 찾지못했던 것을 壬寅년 봄에 인원이 誌石을 發見하는 동시에 근처의 愉葬塚을 굴거했고 그 다음해에 先生木版本猶集을 杞溪兪氏의 집에서 發見했으니 어찌 奇異한일이 아닐까?

이는 易經에 이른바 “밤이 가면 낮이 온다”는 그 理致라. 그리고 대범 詩라는 것은 世敎에 關聯이 있으며 또한 世陋를 諷刺하는 하나의 方道이니 先生의 猶集이 아무리 流落되었다고 할지라도 世上에 傳하게되니 治國에 도움이 되리라.

위에 소개한 行蹟記錄 이외에 墓碑銘,誌石노래,遺稿集,神道碑銘등 始祖 劉筌을 紹介하는 資料는 많으나 省略한다.

紹介한바와 같이 始祖이후 많은 子孫들이 繁昌하여 각기 각 고을에 居住하면서 벼슬을 지낸 先祖를 모시는 門中마다 각기 本官을 따로하는 등 氏族이 派生케 되는데 특히9世 權의 子 潭이 居昌을 2世 견구의 直系孫 10世 賢은 娥林을 담의 셋째叔의 子 松栢은 江陵을 本官으로 하는 등 宗派가 늘어나게 되었다.

이후 송백의 손(12세)敞이 李氏朝鮮 開國時 李太祖를 도와 開國에 同參하여 파평부원군 윤호, 평원군 조영규,남양군 홍길민등과 더불어 開國功臣 2等級을 받아 玉川(江陵의 舊號)府院君에 封하였다. 高麗朝에는 각 종파별로 흩어졌던 문중들을 조선조에 이르러 체계적으로 統括하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우리 劉氏도 12世 敞을 中始祖로 삼어 모든 劉씨를 統括하여 本官을 江陵으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15世 名虛의 長子 信甲을 中始祖로하여 居昌을 본관으로 하였고 15世 永道의 長子 强을 中始祖로하여 本官을 白川으로 定하니 卯金? 劉氏는 이로써 거창, 백천, 강능을 본관으로하는 3개의 종파로 나뉘게되었다.

지금까지 우리 江陵劉氏에대한 대략적인 族譜내용을 간추려 보았다. 살펴본바에 의하면 12세 玉川府院君으로부터 강능유씨의 체계적인 族譜의 構成이 이루어진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에 中間始祖인 옥천부원군에 대한 記錄을 살펴보니 여러 가지 文獻에 公의 記錄이 維持되어 있다. 李朝實錄, 哺隱 鄭夢周의 文人集, 牧隱 李嗇의 文人集, 野隱 吉宰의 文人集등 수없이 많은 기록이 있으나 여기서는 公의 墓碣銘을 紹介하기로 한다.

※ 玉川府院君 領議政 諱 敞의 墓碣銘 ※

公의 諱는 敞이요 字는 太和요 初諱는 敬이요 字는 孟儀라.

劉氏가 中國의 華曺로서 兵部上書 諱 筌이 東國에 嫡配하여 居住하였다.

8代孫인 諱 承備에 이르러 左僕士로 벼슬을 마치고 江陵의 羽溪로 移居로 인하여 羽溪로 (지금의 강능) 本官을 삼았으니 이는 公의 曾祖라, 組의 諱는 松柏이니 開成尹이요, 考의 諱는 天鳳이니 安岳郡事 贈 右議政이요, 妃에 貞敬夫人 喬洞田氏는 備巡衛 成茂의 女라.

公이 至正 壬辰年에 出生 하였는데 天稟이 凡人보다 뛰어났다. 겨우 入學한때에 사람들이 놀랄만한 말을하고 애들과 놀되 智略을 자아내어 애들을 屈伏시켰다. 成長해서는 人品이 端嚴하고 德性이 묵직하며 隨후의 夜光珠와 崑崙山의 美玉이 사람에게 비친 것 같았다.

나이 17세때 科擧에 生員하고 20세때 及第하였다.

文章은 餘事로 삼고 오직 學文에 뜻을두어 처음 些隱 田先生을 스승삼고 다시 牧隱 哺隱 양선생 門下에 從遊하여 格物 致誌 성의정심의 공부를닦아 息肩이 뛰어나서 사람들의 尊敬을 받았다. 목은 양촌 두분이 윤폐와 더불어 이초의 변에 모함으로 청주옥에서 형문을 당하였다.

사람마다 위태롭게 생각했으나 公만은 泰然한 姿勢로 반듯이 天變이 있을 것 이라고 말씀 하셨다. 하루는 큰 비가내려 洪水가 났다. 그리하여 고문관들이 표류하다가 나무를잡고 살아났다. 두분은 석방되고 罪의 有無는 不問에 붙였다. 사람들은 公의 미리보는 점에 대하여 歎服하였다.

그때에 朝政이 昏亂하여지자 드디어 隱退하였더니 太祖가 登極하자 探聞하고 불러다가 처음 成均館大司成을 두어 人才養成의 責任을맡기고 太祖가 날마다 經筵에 臨御하여 公과 柳寬을 명령 日直을 교대시키고 因하여 開國勳에 祿命하였다.

이는 公이 자취를 감춘날인데도 太祖가 特命한 것은 대개 그 人望을 取하였던 것이다. 寵愛는 날로 높아지나 벼슬은 公의 本志가 아님으로 解任하고 神仙배우기를 懇請하였으나 임금을 버리는 것은 忠이 아니라는 太祖의 敎命에 그 뜻을 行치 못하고 仙庵이라고 自號를 하였다. 이제부터는 조정에 있으면서도 신선될 마음은 잊지 않았다.

太宗朝때 글자를 써주어 (御筆) 빛내주고 3代를 追贈하고 子孫들을 百世까지 宥罪케하고 雲臺에 肖像을 걸고 盟錄에 이름을두고 田土를 下賜하고 金石에 功을 새기는 등등 이 모두 世上에 드문 恩惠인 것이다.

散騎常侍知製敎 世子輔德承旨를 歷任 嘉善大夫에 昇進 都評議使寶文閣學士 世子副賓客玉城君이요, 資憲大夫에 승진 知經筵寶文藝文堤學이요, 崇政大夫에 昇進 世子 貳師요, 輔國崇綠大夫에 승진 封 玉川府院君 겸 大提學이다.

公의 나이 老哀하지 않아서 마침내 休退하여 山水에부치고 歌詞를 지어 스스로 興을 도꾸되 그 歌詞에 山 절로 조용하고 물은 절로 흐름이여 이는 바로 이 天地에 自然에서 된것이요, 꽃은 절로 피어 있고 새는 절로 지저귀니 이는 바로 오 萬物의 自然에서 옴이라.

仙字로 自號 짖고 집도 한 채 마련하니 이는 바로 나에게는 그지없는 興趣로다. 하였으니 이에 根本志操가 여기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가히 지내신지 십여년인 永樂 庚子年에 自宅에서 逝去하시니 享年 69歲라.

訃音이 世宗임금께 들리니 임금이 매우 슬퍼하시고 近臣을 보내어 致祭하였으며 최고 벼슬을 贈하고 諡號를 文僖라 하고 不?墓를 命하고 國葬으로 厚葬 하였다. 선비들이 崇墓하여 長成,宋山,高敞,儉岩,永春,龍溪에 모두 祠宇를 建立하여 向拜 하였다.

그 言行이 史冊에 나타나고 謚狀에 실리어 文獻을 가히 證據 할 수 있고 오직 敎書가 國史와 家乘에 실렸으니 “剛明하고 純粹하며 愼重하고 謙恭하며 度量이 깊고 文章이 뛰어나며 意志가 굳고 스스로 學文을 닦아 誠意正心의 道를 自得하고 學文이 넉넉하매 벼슬에 올라 化民成俗의 方法을 베풀며 職責을 다하여 公事를 받들며 마음을 잡고 몸을 단속하며,” 라고 하였으니 公의 平生事를 이에 다 記錄된 것이다. 朝野類輯에는 “太宗朝때 高麗宗室의 子孫으로써 民間에 섞여있는 者를 報告하는이가 있으면 太宗은 그들을 保護하려고 하니 劉 敞이 말하되 殿下께서 오늘날 이러한 뜻을 가지심은 실로 우리 宗社萬代의 福祚라고 하였다. 諫官들이 麗宗들을 誅斬할 것을 奏請하였으나 太宗 임금은 이에 不聽하였다.

그때에 臣下들응 도리어 麗宗들을 해치려고 하나 劉 敞만은 홀로 그 良心을 지켰다.”라고 하였고, 洪相 孔奭周가 지은 용계사 上樑文에 “처음에는 仁命 두자를 陳言 하였으니 聖道가 아니면 임금앞에서 陳啓를 하지 않았을 것이며 이어서 홍범일편을 講進 하였으니 嘉謨가 있기 때문에 內殿에 들어 稟告 하였다. 金櫃와 玉板을 가진것도 公은 榮光으로 여기지 않고 煙閣과 雲臺에 올라서도 公은 高貴로 여기지 않았다. 國土 수천리를 一環으로 民生苦를 自身의 苦로 삼고 後世 億萬年을 目的으로 王業을 自身의 責任으로 삼았다.”라고 하였으니 모두 實積을 들어 말 한 것이다.

配에 廣州李氏는 遁村先生의 女니 辰韓國夫人을 封하고 子에 仁統은 蔭仕로 吏曹判書요, 仁悌는 郡守요, 尙友는 御使요, 사위에 柳思訥은 大提學이며 諡 文肅公이다. 孫에 智周는 經歷이요, 信周는 兵使요, 繼周는 佐郞이라.

그 밑에 子孫들은 다 記錄하지않고 오직 宗派만을 記錄하노니 用良은 參判이요, 琨은 牧使요, ?文도 牧使요, 德仁은 檢知요, 俊民은 副護軍이요, 尙顔은 蔭仕로 五衛將이요, 震夏는 迪順副尉요, 宗閒은 副司勇이요, 萬積,慶眞,弘祥 鋏學源이라.

墓는 廣州 龜川面 蟹川里 右麗壬座에(서울 강동구 상일동)있는데 婦人 李氏는 左? 하였다.

옛날에 大提學 이행공이 지은바 碑文이 있는데 碑와 文이 모두 失傳되었음으로 그 덕업이 死後에 까지 빛나야 될것이 아무런 證據資料가 없고 상자에 두었던것도 永久保全을 못했음으로 子孫들이 이를 恨歎하여 숨은 史蹟을 캐내려고 가진 힘을 다하였다. 그리하여 오늘날에 다시 나타났으니 그 성의가 고마웠다.

슬프도다. 그칠줄을 알았음은 그치는 道가 있기때문이요, 마칠줄을 알았음은 마치는 義가 지극함이라. 道德의 文詞가 풍부하니 藝苑의 大家요, 禮義의금의를 입었으니 世子의 師父라. 이는 선생의 출사한 시종대절이며 格物致知의 용공을 發揮하고 돈세의지조를 堅持함은 선생이 간직한 심결로서 가히 百世까지라도 후인들의 표준이 될만 하다. 命하노니 國運이 열리려고 산신령이 下降하니 그 빛이 고울세라. 선암선생 태여났네. 선생의 포부에는 일월성신 밝아 있고 구슬같은 맑음하고 칼날 같이 날카롭게 벼슬자리 높았으나 누구라서 미치리요.

공자도를 배웠으되 선비중의 참선비라 성의정심 그 공부요 성속화민 그 政治라. 없지못할 인재라서 임금님이 문정하고 물누를 받지않고 깨끗한몸 덕 뿐이라. 려조말기 혼란해라. 세상사를 외면할 때 도는 것이 천리로다. 國運이 돌아오니 太祖임금 登極하자 자주찾아 불러다가 시망에 올랐기에 開國功臣 封 했으나 허명무실, 그녹권을 받아보니 미안해라. 신선될 그 마음은 고금의 일반이라. 은하수에 헤엄치듯 활발하게 휴양했네.

문체좋은 예복으로 사단에 오래있고 때로는 임금에게 命과 仁을 깨쳐주되 原理는 天道라.

기수홍범 진강하고 고려유족 보전하여 임금은혜 이뤘도다.큰 공적 생각보다 벼슬마다 뜻 굳치니 누구보다 도덕높고 몸은 가네. 저 시골로 새 고을에 祠宇제사 선비들의 빛이로다. 선생 事蹟 알려거든 碑에 새긴 글을 보라.

숭정기원후 넷째 병오년(헌종24년,서기1846년)에 숭정대부 판의금부사원임 이조판서 겸 지경연춘추관 홍문관제학삼주 이광정 글.

이상과같이 中間始祖인 玉川府院君 諱 敞에대한 대략적인 행적을 소개했다.

※ 선조의 묘소 및 사당이 위치한 곳 ※

1. 시조 병부상서 문양공 휘 전 호 죽간선생 묘소

소재지 : 경북 영천군 영천읍 녹전리(배위 진한국부인 용서이씨 묘는 시조묘 계하) 사당(구인재) 및 신도비는 묘소와 함께 있으며 죽간선생문집 목각판을 보존하고 있는 재오정(사당)은 경북 영덕군 달산면 이곡동에 있음.

2. 9세 사헌대부대사헌 휘환, 배 정부인 강양이씨의묘.

소재지 : 경남 거창군 마이면 월계리 반월현에, 사당(영사정)은 거창군 위천면 장기리 신반장촌(위천국교교정)에 신도비와 함께 있음.

3. 10세 용궁현감 휘 담의묘

소재지 :경남 거창군 마이면 월계리 반월형에 있고 배 숙부인 성산이씨의묘는 위천면 황산리에 사당(불이재)은묘소에 황강재는 위천면대정리에

4. 12세 어영장군 병조판서 휘 귀손 강청공 묘소

소재지 : 거창군 위천면 대정리, 배 정경부인 완산이씨의묘는 거창 마이면 월계리에 12세 휘 영손의 묘와 함께 있음.

5. 13세 기자전 참봉 휘 관 및 기자전 참봉 휘 숙, 14세 휘 우민배 성종어씨, 14세 휘 우사 배 성주이씨의묘는 거창 위천면 대정리 황산에

6. 12세 옥천부원군 영의정 휘 창 문희공의 묘 및 신도비 배 진한국부인 광주이씨의 묘(신도비 포함)

소재지 : 서울 강동구 상일동 322번지

송계서원 및 사당은 전남 장성군 북상면송산리에, 어필각 및 영정각은 경북 칠곡군 북삼면 숭양리에 있음.

검암사 : 전북 고창군 고창읍 월암리

해천재 : 서울 강동구 상일동 산322번지

홍현갓 : 강원도 영월군 남면 흥월리 후평동

월계사 : 전남 승주군 월등면 담계리

7. 13세 이조판서 호 청계 휘 인통, 배 정부인 평양조씨묘9부좌)

소재지 : 서울 강동구 상일동 산 322

13세 삼척진 수군절제사 휘 인부의 묘 및 묘선각

소재지 : 충북 단양군 영춘면 사이곡리 삼대산 덕거리

8. 14세 평안병마절도사 휘 신주의묘와 (상덕재)

소재지 : 충북 진천군 백곡면 사곡리

9. 15세 어모장군 휘 웅, 예조좌랑 휘 호, 진사 휘 표의묘도 진천군 백곡면 사곡리에 있음.

10. 15세 무장현감 임진공신 호 은재 휘 한랴의묘 및 경모재

소재지 : 전북 고창군 고수면 하두치

위에 소개한 묘소 및 사당 이외에도 충북 제천, 전남 장흥, 강원 정선, 영월, 전주시 안양동 등 여러곳에 묘소와 사당이 있으나 여기에 다 열거치 못한다.

※ 현존 자손의 직계표 ※

28세   병삼.

29세   병삼의 자1 기열, 자2 사열.

30세   기열의 자 재영, 사열의 자 재암.

31세   재영의 자 화종, 재암의 자 금종.

32세   화종의 자 영봉, 금종의 자 영주, 영선, 영취.

33세   영봉의 자 광상, 재상, 광근, 광상, 복희, 복자.

      영선의 자 두남, 춘상.

      영취의 자 현상, 장상, 봉상.

34세   현상(복현)의 자 환인(인기), 환선(선기), 재기

      장상(복춘)의 자 환명(명기)

      봉상(복윤)의 자 환전(전기), 환일(일근)

35세   환인(인기)의 자 경식(경민)

      환선(선기)의 자 경균(경진)

※ 대 동 행 렬 도 ※

30세 : 時 ○ 載 ○ 31세 : ○ 鎬 ○ 鍾

32세 : 永 ○ 承 ○ 33세 : ○ 相 ○ 根

34세 : 煥 ○ 容 ○ 35세 : ○ 均 ○ 埴

36세 : 鎭 ○ 鉉 ○ 37세 : ○ 濟 ○ 洙

38세 : 東 ○ 桓 ○ 39세 : ○ 燮 ○ 榮

40세 : 圭 ○ 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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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족은?

2006/07/30 20:58
 

우리家族은

나, 內務長官, 딸(밍키), 아들, 이렇게 네 食口가 서울 冠岳區 新林4洞 471-21號 조그마한 單獨住宅에 보금자리를 틀고 있지요. 항상 모자라는듯한 아쉬움에 살아가고 있지요.

長官(마리아)

집에서 일하며(家族建康및 침식제공) 요즘은 經濟공부에 여념없지요.

珍敬(수산나,밍키,큰딸)

98년도에 大學을 卒業하고 지금은 jakarta 유치원 敎師로 在職도 하였으며,지금은 한국에서 유치원 선생하면서 대학원에서 특수 아동학을 전공하고 있지요

취미는 클라리넷, 장구, 피아노등이며 재능이 무척다양하지요.

E-mail : mingkey010@lycos.co.kr

Homepage : http://blog.kjnala.com/jk

TEL(home) : 02-857-7633

Mobile : +82-(0)17-203-7633

京珍(스테파노,KJ,아들)

大學에서 情報通信을 專攻하지요. 2001년 군에서 제대후 공부를 하다가,

2002년 미국에서 생활후 지금은 영국에 간지 3년이 훌쩍 지나가 버렸습니다.

영국의 수도인 런던에서 대학교에 다니고(UCL) 있으며 전공인 Computing공부에 여념이 없지요

E-mail : yookyoji@hotmail.com

Homepage : http://blog.kjnala.com

TEL(home) : +44-(0)207-209-0452

Mobile : +44-(0)7796-302-616 / +82-(0)17-277-4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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