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씨(劉氏)의 연원
劉氏 大觀 (유씨 대관)
劉字를 "卯金刀" 통상(通常) 묘금도유 라고 새김한다. 그러나 사전(辭典)에서는 예외적으로 성유(姓也), 이길유(剋也), 쇠잔할유(衰也), 죽일유(殺也)등으로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
劉字로 성(姓)을 쓰이게 된 유래(由來)
통지씨족약(通志氏族略)에 의하면 우리가 劉字로 성을 쓰이게 된 것은 중국고대(中國古代)의 제요도당대(帝堯陶唐代)의 다음으로 劉字를 성으로 쓰게 되었다.
원래는 지명(地名)을 나타내는 글자로서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정(鄭)나라 읍명(邑名)을 지칭하였다가 그후에도 주(周)나라에서는 대부채지(大夫采地) 또는 하남성언사(河南省偃師)의 읍명(邑名)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고 춘추지리고(春秋地理考)는 밝히고 있다.
그후 하(夏)나라 14세 공갑왕(孔甲王)으로부터 유루(劉累)라는 분에게 "어룡"氏로 사성(賜姓)하였고 상(商)나라 때에는 시위(豕韋)氏로 주나라 때에는 당두(唐杜)氏로 각각성(姓)을 고쳐부르다가 한고(漢高)께서 한제국(漢帝國)을 창건(創建)하시고 황제(皇帝)에 등극(登極)하시면서 劉字를 우리 姓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 劉氏는 한제국(漢帝國)의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 劉邦 선조의 위대한 혈통(血統)을 이어받은 훌륭한 후손(後孫)인 것이다.
劉氏 본원(本源)의 시조(始祖) : 漢太上皇(한태상황)
문헌상(文獻上)으로 보면 유구(悠久)한 반만년전(半萬年前) 중국고대 하왕조말엽(夏王朝末葉)에 累(루)라는 분이 있었는데 이분이 바로 유씨본원(劉氏本源)의 시조이시다.
이 분의 아드님이 明(명)이시고 손자에 遠(원), 증손에 陽(양)이시며 고손자에 獲(획)이시고 6세손에 淸(청), 7세손에 仁, 8세손에 諱가 (단)이신데 字는 執嘉(집가)이시며 부인은 諱含始(휘함시)이시며 昭靈夫人(소령부인)이시다.
이분이 곧 漢太上皇(한태상황)이시며 우리 劉氏의 1세손이시다. 이분의 슬하에 四子를 두셨는데 長子에 伯(백), 次子에 仲(중), 三子에 季(계), 四子에 交(교)이신데 三子이신 季(계) 되시는 분이 바로 漢高祖(한고조)이시다.
漢高祖(한고조) 諱(휘) 邦(방)의 약사(略史)
한고조이신 劉邦께서는 기원전 256년에 주(奏)나라 페풍읍 중량리 지금의 강소성에서 휘 (단) 태공(太公)의 三男으로 태어나셨으며 字는 季(계)라 하였다.
公이 세상에 태어나시기 전에 公의 모친 昭靈夫人(소령부인)은 우연히 집 주원(周園)에 있는 큰 연못가에 나왔다가 자신도 모르게 혼곤히 잠이 들고 말았다. 그런데 꿈에 선인(仙人)이 내려와서 모친의 품속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깜짝 놀라 눈을 뜨자 갑자기 온천지가 캄캄하게 변하고 천둥소리가 요란하더니 돌연 눈앞에 이무기(용이 되려다 못되고 물속에 산다는 큰구렁이) 한 마리가 몸둥이를 사리고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로 公의 모친은 태기가 있어 劉邦 즉 漢高祖(한고조)를 낳으셨다. 公은 용봉(龍鳳)과 같은 기상을 지니고 있었으며 기골이 장대하시고 특히 수염이 아름다운 비범한 인물이셨다.
성품은 활달하시고 정확한 판단력과 주저하지 않는 결단력 그리고 도량이 넓으셔서 남을 도와 주기를 좋아하셨다. (優人喜施:우인희시, 仁而寬:인이관, 意豁如也:의활여야) 또 하나 기이한 것은 公의 왼쪽 장단지에 까만점이 77개나 있었다. 公은 일찌기 지방시험에 합격하시어 사상(泗上)의 정장(亭長)이 되셨는데 公의 주위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들고 또 따랐다.
특히 당대의 유명한 관상가단부(觀相家單父) 현사람인 呂文(여문)은 공의 비상한 용모에 감탄하여 늘 입버릇처럼 "公은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이다. 앞으로 무상(無上)한 영광을 누릴 큰 인물이다" 라고 말하였다.
여문은 公을 사위로 삼고자 公을 자기집으로 초대하여 주연을 베푼자리에서 "劉公은 장차 크게 또 귀히 될 사람이니 부디 몸조심 하기 바라오 장성한 딸을 맡기겠으니 사양하지 말라" 고 하자 공은 정중하게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여문의 간절한 청을 더 거역할 수 없어 마침내 승낙하고 말았다.
다음날 公은 패현령(沛縣令)의 명을 받고 복역수를 압송하여 여산릉(驪山陵) 공사장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압송 도중에 도주하는 자들이 많아 해질무렵에 풍서에 도착한 公은 죄수들에게 "당신들은 한 번 여산으로 가면 그 중역을 벗어날 길이 막연할것이니 제각기 자기의 살길을 찾도록 하라" 고 선언하였다.
그중 십여명이 公을 따라 가겠다고 하여 그들과 함께 公의 일행이 망탄산 어느 오솔길로 접어 들었을 때 갑자기 길이 희미해 졌다. 이상히 여긴 公은 영리한 사람 하나를 보내 길을 알아 오도록 하였더니 잠시 후 그사람이 허둥지둥 달려와서 "지금 열자가 넘는 큰 백사(白蛇)가 앞길을 가로막고 있으니 딴 길을 택해야겠습니다" 라고 고하는 것이었다.
이에 公은 "장사가 가는길에 감히 무엇이 무서울게 있단 말인가" 라고 외치면서 큰칼을 뽑아들고 옷자락을 휘날리며 달려가서 열자가 넘는 백사를 내리쳐 단칼에 두동강이를 내고 앞장서서 걸어갔다. 뒤에 따라온 일행은 두동강난 큰뱀을 쳐다보며 저마다 "참으로 용감한 대장부이시다" 라고 감탄하면서 저분을 끝까지 따르리라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기이한 일이 생겼다. 큰뱀을 베인곳에 밤마다 백발이 성한 노파가 나타나서 두동강이가 된 큰 뱀의 시체를 안고 구슬프게 울부짖는 것이다. 이 광경을 보며 그곳을 지나던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그 노파에게 "그 징그러운 동물을 제거했는데 무엇 때문에 그처럼 슬퍼하시오." 라고 하자 그 노파는 여전히 울먹이면서 "모르는 소리 말아라 나의 아들은 白帝子(이다음 진나라를 말함)인데 마침 백사로 화신하여 길에 나왔다가 赤帝子(이다음 한나라를 말함)의 칼에 맞아 죽었으니 억울하고 또 의지할 곳이 없어 이처럼 통곡하는 거다" 라고 대답하였다.
이말을 들은 일행은 미친 노파라고 단정하고 지팡이를 들어 떠밀려는 순간 그노파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한편 거대한 백사를 단칼에 죽였다는 소문이 퍼지자 비범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여 公의 곁으로 모여드는 장정들이 수백명에 이르러 점차 그 세력이 확충되어 갔다.
이 무렵 패현의 관리로 簫何(소하)와 曺參(조참)이라는 두 장수가 진(秦)나라를 쳐부수기로 협의하고 또 한편으로는 망탄산에 망명중인 公을 불러 들여 함께 의거하기로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公은 즉시 수백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패현으로 달려갔다. 이때 公의 세력은 구름같이 모여드는 장정들로 더욱 강대해져 갔다.
그러나 현령은 公의 세력이 강대해지는 것을 보고 자기의 큰 실수로 후회한 나머지 소하와 조참을 불러들여 문책하기를 "너희들이 허울좋은 구실로 나를 속여 劉邦을 끌어들여 패현을 빼앗으려 하고 있으니 그 죄를 용서할 수 없다" 하면서 그들의 목을 베라고 명령한 다음 劉邦의 일행은 한놈도 성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엄명하였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의 청에 의하여 다행히 소하와 조참에 대한 참수령은 취소되었으나 공의 일행은 성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을 때 소하와 조참 두 장수가 수십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公을 찾아와서 "劉公은 지금 세력이 강성하니 기회에 무능한 현령을 처단하고 패현을 취한 다음 이를 근거로 하여 흩어져 있는 지사(志士)들을 규합 의거를 일으킨다면 향후천하(向後天下)를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간절히 청하였다.
이말을 들은 公은 침착한 어조로 "두 사람이 과연대의(果然大義)를 주장할 뜻이 있다면 당장 일어나서 무능한 현령을 처단하고 새로이 현명한 인물을 뽑아 현령의 자리에 앉히면 자연히 민심이 수습되어 대사를 이룰 수 있을 것이요" 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소하와 조참은 다시 公에게 "지금 패현의 백성들이 모두 불안감에 사로잡혔으니 화살 끝에 효유문(曉諭文)을 매어 성안에 쏘아 보내면 저절로 내란이 일어나 사흘안에 패현을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재차 간청하여 공은 그들의 말을 따르기로 하고 수십통의 효유문을 써서 성안으로 쏘아 보냈다.
그 효유문에는 "우리는 진(秦)나라의 학정에 시달려 온지 벌써 오래이다. 그러므로 나 劉邦은 삼가 공의(公義)에 따라 우선 현명한 현령부터 다시 선출하여 이 현의 백성들의 살길을 되찾게 한다음 점차 의병을 모집하여 각처의 호걸들과 함께 잔학무도한 진나라를 쳐부수고자 한다. 지금 너희들이 이 점을 감안하여 천명에 순응한다면안전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아니할 경우에는 성이 함락되는 날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라고 써 있었다.
이 효유문을 본 패현의 백성들은 서로 모여 의논하기를 "지금 劉邦의 세력은 강성하고 소하와 조참까지 劉邦을 따르기로 하였으니 패현이 함락되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한시바삐 궐기하여 劉邦을 따르는 것이 우리의 살길이다" 라고 하면서 수많은 군중들이 관아로 달려가서 무능한 현령을 처단한 다음 성문을 활짝 열고 환성을 지르며 公을 맞아 들였다.
구름같이 모여든 백성들은 정중히 현령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公은 이를 완강히 거절하고 받아 들이지 아니 하였다가 열화같은 온 백성들의 간절한 성화에 견디지 못한 公은 이를 수락하고 패현(沛縣)의 현령이 되었다. 수많은 군중들의 환호와 축하속에 성위에는 붉은 색의 깃발이 수없이 꽂아 그 위세를 과시하였다. 과연 赤帝子(적제자)의 아들이라고 한 그 노파의 말이 꼭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패현의 현령이 되신 공은 삼천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함양을 쳐들어가 진(秦)의 왕자 영을 폐위시키고 기원전 206년에 漢나라의 왕이 되었다.
漢王이 되신 公은 漢나라 사람으로 마치 孫武子(손무자)처럼 적을 요리하여 승리를거두는 병법과 법려처럼 큰 공을 세운 뒤에도 선뜻 물어서는 묘법을 구사하는 지략을 지닌 사람으로 이름은 張良(장량)이며 字는 子房(자방)을 사부로 삼고 신출귀몰한 병법을 구사하는 한신장군(韓信將軍)을 대원수(大元帥)로 하여 장주(丈洲)를 평정시켜 30만의 대군을 얻는 큰 성과를 거두므로써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르듯 당당하였다.
이어 여세를 몰아 조(趙)나라 20만대군을 격파하고 조왕(趙王)을 사로잡는 등 대전공을 세웠으며 이와같은 승승장구의 대세로 물밀 듯이 연(燕)나라와 제(齊)나라 그리고 오(吳)나라 등을 피하방울 흘리지 않고 항복(降伏)을 받았던 것이다.
한편 진(秦)나라를 폐망시키고 초(楚)를 세운 다음 진(秦)의 구세력을 대표해 오던 項羽(항우)와 진(秦)의 학정에 시달린 반감으로 인하여 규합된 신흥세력을 대표하는 한(漢)나라 왕이신 劉邦과의 처절했던 5년안에 걸친 이른바 한초전(漢楚戰)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바이며 이 유명한 초한전사(楚漢戰史)는 지금도 청사(靑史)에 길이 빛나고 있는 것이다.
천하무적의 역발산(力拔山) 항우도 결국에는 漢王이신 劉邦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던 것은 항우의 힘이 역발산이기는 하나 성질이 과격하고도 교활하여 백성들의 생활이나 고충 따위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잔인무도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항복한 군사들까지 모조리 생매장한 일이 있을 뿐 아니라 공격하는 곳마다 이와 같은 잔악한 행동을 하여 백성들의 원성과 반감이 대단하여 인심이 이미 항우(項羽)곁을 떠나 한왕(漢王)이신 劉邦에게 기운지가 오래였던 것이다. 이것은 바로 올바른 주인으로 劉邦을 하늘에서 내리신 까닭이다.
그리하여 기원전 202년에 천하를 통일하시고 한제국(漢帝國)을 창건하시어 2월 갑오(甲午)에 남쪽〔사수()갱도서북쪽〕에서 고황제(高皇帝)의 재위(在位)에 등극(登極)하셨으며 장안(長安)에 도읍(都邑)하셨다.
한고조께서는 한제국의 통치방향을 우선 진(秦)의 학정과 오랜 전란(戰亂)에 백성들의 민심을 수습하고 그들의 살길을 도모하는데 최우선을 두고 선정(善政)을 베푸시는 한편 진(秦)과 초(楚)가 패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원인을 가려 이를 점진적으로 국사에 반영시킴으로서 한제국의 초기 기반을 튼튼히 구축하였다. 즉 진(秦)나라가 중앙집권적인 관료제도아래 군현정치(郡縣政治)를 무리하게 급진적으로 강행하여 백성들에게 큰 고통을 주었고 또 가혹한 징발(徵發)과 중세(重稅)및 과중한 노역등에 시달려 원성이 컸으며 이를 견디지 못하고 유민(流民)이 되어 살던 곳을 떠나거나 강제로 노예가 된자가 많아 강권(强權)과 강압(强壓)에 의한 진(秦)의 통일정책의 여파는 온 백성들의 반감을 가져오게 되어 패망하게 되었고,
이어 항우 역시 진(秦)의 무리하고 강요된 악정(惡政)을 또다시 부활시키려고 하다가 민심이 이탈되어 실패한 점을 거울삼아 이 양자(兩者)를 절충한 이른바 군국정치(郡國政治)를 잘 펴나가면서 효제(孝悌)를 중심으로 한 가족도덕을 중시하는 유교(儒敎)가, 중국의 가부장적 가족사회(家父長的家族社會)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가장 적합한 사상과 제도라고 판단하시고 유교(儒敎)를 국교(國敎)로 삼아 인의(仁義)로서 백성을 교화시켜 부모에게 효도하게 하고 어른을 공경하여 신의(信義)로서 도리를 지켜 중(中)을 세우고 화(和)를 주도케 하는 중화사상(中和思想)으로 인륜을 밝게 하셨다.
억울한 죄인을 없애기 위해 형벌을 공정히 다스렸으며 바른 충신(충신)을 목마르듯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재를 등용하는 법이 공정하고 분명하여 어진 사람에게 중직을 맡기고 적재적소에 활용함으로서 요행(僥倖)이 사라졌다. 평온할 때 위태로움을 잊지 않는 위정이덕(爲政以德)으로 그 덕과 위엄이 천하에 미쳐 온 백성들이 요순시대(堯舜時代)를 다시 구가하게된 것이다. 따라서 높고 높으신 한고조의 위대하신 업적과 크나큰 공덕은 아무리 빛나는 훌륭한 문체로서도 표현할 길이 없다 할 것이다.
그리고 한고조께서 한제국을 창건한 이래 후손이 연면(連綿)이 번성(繁盛)하여 五百年 동안 삼십여(三十餘) 군(君)의 황제가 누대(累代)로 제위(帝位)를 계승하신 것 또한 모두 한고조의 은덕(恩德)이며 영광이라 할 것이다. 그래서 한고조의 칭호를 높여 태조(太祖)를 붙여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라 하시었으며 12년간 재위하시다가 서기전 195년에 향년(享年) 53세에 서거(逝去)하셨다.
중원천하(中原天下)를 통일하시고 한제국을 창건하신 한고조의 다음(二 代) 황제는 효혜황제(孝惠皇帝)로서 휘 盈(영)이시며 字는 滿(만)이시고 재위7년에 정년 24세로 서거하시었다.
三代 효문황제(孝文皇帝)이시며 휘는 恒(항)이시고 字는 常(상)이시다. 23년간 재위 하시다가 서거하시니 향년 46세이셨다.
이어 四代 효경황제(孝景皇帝)의 휘는 啓(계)이시고 字는 開(개)로서 16년간 재위하시다가 향년 48세에 서거하셨으며,
五代 황제는 효무황제(孝武皇帝)로서 휘는 撤(철)이시며 54년간 재위하시다가 서거하시니 수(壽) 70세요.
六代 광무황제(光武皇帝)의 휘는 秀(수)이시고 字는 文淑(문숙)이시며 33년 재위하시고 63세에 서거하셨다.
그다음 七代 효명황제(孝明皇帝)께서는 휘 莊(장)이시며 초휘 陽(양)이신데 18년간재위하시다가 48세에 서거하셨으며,
八代황제이신 효장황제(孝章皇帝)의 휘는 (훤)이시고 13년간 재위하시다가 향년 31세에 서거하셨고,
이어 九代황제는 효화황제(孝和皇帝)로서 휘는 肇(조)이시고 17년간 재위하시고 향년 27세에 서거하셨다.
그후 소열황제(昭烈皇帝)의 휘는 備(비)이시며 자는 玄德(현덕)이시고 2년간 재위하시다가 향년 63세에 서거하셨으며,
이어 소열황제(昭烈皇帝)의 아들 後황제의 휘는 禪(선)이시고 자는 公嗣(공사)이신데 41년간 재위하시다가 65세에 서거하셨다.
(史記八卷前漢書:사기팔권전한서)
昭烈皇帝(소열황제) 諱(휘) 備(비)의 약사(略史)
서기 184년 중국후한(中國後漢) 광화6년(光和六年)에 장각(張角)을 수령으로 하여 일어났던 도독을 황건적(黃巾賊)의 난(亂)이라고 하는데, 이때 중원각지(中原各地)에서 군웅(群雄)이 활거하던 시대에 난립되어 있던 대소제국(大小諸國)을 평정시키고 촉한(蜀漢)의 초대황제의 제위(帝位)에 오른 유비황제는 한고조 劉邦의 22세손으로 정통 황손(皇孫)이시다.
소열황제 유비께서는 서기 161년 탁현의 누상촌(樓上村)에서 태어나시어 字를 玄德(현덕)이라 하시었으며 한나라 중산정왕(中山靖王) 劉勝(유승)의 후손이시다.
부친 劉弘(유홍)은 일찍이 별세하시어 생활은 빈곤하였으나 효성이 지극하고 타고난 기품과 골상(骨相)은 천자(天子)의 혈통을 이어받은 후예임이 역력하여, 키는 팔척이요 귀는 유난히 커서 어깨위에 닿았으며 성품 또한 온화하고 후덕하여 너그러운 포용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강인한 의지력과 임기응변하는 지혜와 넓은 식견까지 겸비하고 있었으니 실로 인(仁)과 의(義)와 덕(德)으로 뭉쳐진 영걸(英傑)이시었다.
황건적(黃巾賊)의 난(亂)이 일어나 온 천하가 혼란에 빠지자 공은 관우, 장비등과 도원(桃園)에 제단을 마련하고 천지신(天地神)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의형제의 결의를 맺은 것이다. 비록 같은날 태어나지는 못했으나 생사를 같이 하기로 굳게 다짐하였다.
그러나 의(義)와 예(禮)에 있어서는 군신의 관계를 지키자고 맹세한 것이니 난세(亂世)를 바로 세워 천하를 도모할 영도자를 정하는 의식이었던 것이다.
비분강개와 우국충정이 넘쳐 흐르는 의거(義擧)의 격문을 읽고 구름처럼 모여드는 수많은 의군(義軍)의 의병대장이 된 公은 청주대흥산(靑州大興山)에 웅거하여 양민을 학살하고 재물을 노략질 하는 오만여명의 황건적을 일격에 무찌르는 대승(大勝)첩을 효시로 세상을 크게 어지렵혔던 황건적의 무리를 완전히 토벌하여 그 전공이 하늘에 닿았으나, 부패한 간신배들의 농간으로 인하여 의기(義氣)와 용맹의 합당한 관작은 물론 관기(官旗)도 갖지 못한채 유전(流轉)하며 각지의 군웅(群雄)들과 자웅을 겨루다가,
서기 194년에 서주목(徐州牧)이 되고 후일을 도모하고자 병마를 조련하던중 고사(高士) 사마휘(司馬徽: 水鏡先生)와 서서(徐庶) 단복으로부터 륭중(隆中)고을에 와룡선생 대현인 제갈량(臥龍先生 大賢人 諸葛亮) 字 공명(孔明)은 주(周)나라 800년을 일으킨 태공(太公) 여망(呂望), 또는 한나라 창업 500년의 기초를 닦은 장자방(張子房)에 비길만한 당대의 대재(大材)라는 말을 듣고 감탄한 공은 제갈량을 군사(軍師)로 삼고자 관우 장비와 함께 삭풍(朔風)이 몰아치는 겨울, 제갈량의 초로(草蘆)를 찾아 갔으나, "행운종적(行雲踪蹟)이 일정치 않아 어디에 갔으며 언제 올지 모른다."는 동자(童子)의 말을 듣고 돌아온 공은 섣달 그믐날 살을 예일 듯이 휘몰아 치는 차가운 눈보라 길을 헤치며 제갈량의 초로(草蘆)를 또 다시 찾아간 공에게 "제갈공명(諸葛孔明)은 아침 일찍 어디론가 떠나고 없다" 라는 제갈공명의 아우 말을 듣고 다시 찾아 오겠다는 간절한 뜻을 글로 남기시니 "備(비)가 높으신 이름을 사모한지 오래매 두번 뵙고자 찾아 왔다가 두번다 허행을 하게 되오니 섭섭한 마음 측량할길 없습니다.
備(비)는 한조모예(漢朝苗裔)로서 외람되게 분수에 넘친 명작을 받자왔으나 엎드려 현하정세를 관망하건대 조정이 능체(陵替)하고 강기(綱紀)가 무너지고 군웅(群雄)이 나라를 어지럽게 하고 악당이 천자를 속이니 참으로 備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備는 비록 광제(匡濟)하려는 성심은 있다 하오나 실로 아무런 경륜지책(經綸之策)이 없습니다. 오직 바라옵기는 선생의 인자와 충의이오니 선생은 개연히 여망(呂望)의 대개를 펴시고 자방(子房)의 홍략(鴻略)을 베푸시옵소서, 오늘은 우선 글로 아뢰옵고 다음날 다시 목욕 재개하고 특히 존안을 뵈옵겠습니다." 라고 글을 공명선생의 동생에게 부탁(付託)하고 물러 나왔다.
다시 길일을 택하여 목욕재개하고 세 번째 제갈공명을 찾자 장비는 물론 평소 온후했던 관우까지도 못마땅히 하며 만류하자, 공은 "옛날 주나라의 문왕이 연수(涓水)에 가서 태공망을 찾았을 때 태공망은 낚시를 드리운 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문왕은 그뒤에서 낚시질을 방해하지 않고 해가 질때까지 기다렸던 것이다. 태공망은 그성의에 감동하여 문왕(文王)을 보좌하게 되었고 마침내 800년의 주(周)나라 기틀을 잡게된 것이다.
옛날 사람이 이러했거늘 이정도의 고생쯤은 이 玄德(현덕)은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관우 와 장비를 꾸짖고, 세 번째 제갈공명의 초려문전(草蘆門前)에 이른 공은 제갈공명을 찾자 제갈공명은 그때 초당(草堂)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공은 선생께서 깨기를 기다렸다가 잠에서 깨어난 제갈공명에게 한실(漢室)은 기울고 있으며 간신들은 천자의 총명을 가리우고 역적이 득세하는 이 난세를 구할 방책을 묻고 사부(師父)가 되어 줄 것을 간청하자 청경우독(晴耕雨讀)하고 싶다고 거절하는 제갈공명에게 재차 "지금 공명이 나서지 않는다면 한실의 천하는 망하고 말것이니 슲은 일이다." 라고 탄식하며 다시 간청하자 그때야 제갈량은 "장군은 저를 만나기 위해 제주(諸州)를 헤메셨고 저는 장군의 부름을 받기 위해 오늘까지 초야(草野)에 묻혀 때를 기다렸는지 모르겠다.
별재주도 없는 이에 대하여 삼고(三顧)의 예를 다하고 과분한 지촉(至囑)으로 부르셨으니 견마(犬馬)의 힘을 아끼지 아니하고 국사에 미력을 다하겠다." 라고 응락하면서 공에게 말하되, "북은 조조에게 맡겨 천시(天時)를 차지하고 장군(將軍)은 인화(人和)를 차지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먼저 형주(荊州)를 취하시어 자기집을 삼으시고 그다음으로 서천에 기업을 세워 정족지세(鼎足之勢)를 이루신 연후에 중원(中原)을 도모하게 될것입니다." 라고 공명은 이미 천하가 삼분(三分)할줄 미리 알고 있었으니 참으로 만고에 드문 천하대재(天下大材) 예언가를 얻으셨으니 마치 구름을 헤치고 청천(靑天)을 보는 듯 공께서 몹시 기뻐하셨다.
그때 공의 나이 47세요 제갈공명은 27세였다. 서기 207년 이른바 삼고초려(三顧草蘆) 끝에 제갈공명을 군사(軍師)로 삼은 유비장군은 제갈공명을 오(吳)나라의 손권(孫權)에게 보내어 오(吳)와 군사동맹을 맺게하여 조조와 대결한 것이니 이를 두고 그 유명한 적벽대전(赤壁大戰)이라 하며 이 전투에서 오나라 손권과 유비장군의 동맹군은 불과 5만의 군사로 조조의 80만 대군과 격전 끝에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 청사에 남은 적벽대전의 지역은 지금의 양자강 유역 호북성(湖北省)의 가어현(嘉魚縣)으로서 당시 손권과 유비장군의 동맹군에게 대패한 조조가 혼비백산 페주하다가 관우에게 포로가 되어 죽게된 것을 의리에 강한 조조와의 옛정을 못잊어 그를 살려 보냈던 것이다.
이에 군사인 제갈공명은 군령(軍令)을 저버린 관우를 군율(軍律)에 따라 처단하려하자 공은 군왕의 신분이면서도 신하인 관우를 살리기 위하여 또 다른 신하에게 사죄하는 것도 불사했던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적벽대전에서 대승을 거둔 공은 서기 209년 그 여세를 몰아 형주를 점령하여 국가의 기반을 구축하고 병마를 조련하여 무릉(武陵)에는 장비, 장사(長沙)에는 관우등을 보내어 차례대로 평정하고 그 싸움에서 오호대장(五虎大將)의 한사람인 황충장군(黃忠將軍)을 얻었으며,계양(桂陽)에는 조운을 보내 항복받고 영양(零陽)등 사군(四郡)을 모두 평정하였으며 주변의 대소국을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평정하여 촉한(蜀漢)을 세워 황제의 제위에 오르셨으나,
후주(後主)의 모친은 당양싸움에서 아들을 살리기 위하여 조운에게 맡기고 우물에 뛰어들어 자살하고 감부인은 당양싸움에서 형주를 차지하고 있을 때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손부인(孫夫人)은 공이 육손(陸遜)에게 패하자 죽은 줄 알고 양자강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등 가정에 헤아릴수없는 아품을 당하였으며, 도원의 의형제인 관우는 형주에서 오나라 여몽대장에 게 사로잡혀 죽었고 이를 안 장비는 그원수를 갑고자 오나라에 진격하다가 부하에게 죽음을 당하는 등의 애석함을 안고 재위 2년 동안에 인의덕(仁義德)을 겸비한 황제께서 공명선생과 같은 천하 대재(大材)의 도움을 얻어 정사를 베푸시다가 천수를 다하지 못하시고 서거하시니 향년 63세이시었다.
태자유선(太子劉禪)이 후황제(後皇帝)에 즉위하셨으니 한고조의 23세손이시고 재위 41년에 향년 65세에 서거하셨다. 아버지 소열황제께서는 임종때 차남노왕(次男魯王)을 불러 "내가 죽은 뒤에 너희들 형제는 승상 제갈공명을 아버지로 생각하고 섬기도록하라. 무슨 일이든지 승상의 가르침을 따라야만 한다." 라고 하셨다. 또 소열황제는 유언으로 부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勿以善小而不爲(물이선소이불위:선한일은 아무리 작은것이라 할지라도 아니하지 말것이며) 勿以惡小而爲之(물이악소이위지:악한일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결코 하지 말아야 한다)" 라고 하셨으며 "현(玄)과 덕(德)은 사람을 움직이는 근본이니 이를 항시 잊지마라" 는 유훈을 남기셨다.
유씨 도시조(劉氏 都始祖) 약사
우리나라 劉氏 都始祖 (유씨 도시조 유전)
우리나라 유씨의 도시조(都始祖)는 고대 중국 한(漢)나라 태조 고황제(太祖 高皇帝)의 사십세손이신 휘는 전(筌)이시고 자는 原甫(원보)이시며 호는 竹諫(죽간) 시호는 文襄(문양)이시다.
공은 중국 강소성 롱서현(中國 江蘇省 西縣)에서 서기 1051년 4월 8일에 출생하시어 송(宋)나라의 정현대부 한림학사 병부상서(正憲大夫 翰林學士 兵部尙書:우리나라 현 국방부장관)로 재임하셨으며 배(配:아내배)는 진한국부인롱서이씨(辰韓國夫人西李氏)이시다 .
공(公)의 증조부(曾祖父)에 휘는 宗(종)이시고 벼슬은 송조한림(宋朝翰林)이셨으며 조부(祖父)의 휘는 迪(적)이시며 벼슬이 송조이부상서(宋朝吏部尙書)이셨다. 또한 부친의 휘는 采(채)이시고 벼슬은 송조 금자광록대부(宋朝金紫光錄大夫)이셨다.
공께서는 천성(天性)이 어지시면서도 강직하시어 바른 직언(直言)을 삼가 하지 아니하셨고 불의(不義)와는 타협을 하지 않는 곧은 성품이셨다. 또 학문이 깊고 넓으셔서 통달(通達)하지 아니한 서적(書籍)이 없으셨으니 역경(易經), 서경(書經), 시경(詩經), 예기(禮記), 효경(孝經), 춘추(春秋), 논어(論語), 맹자(孟子), 주역(周易),등 구경(九經)과 많은 학자들의 글을 빼놓지 아니하시고 암기하셨으며 천문지지학(天文地誌學)과 의약복서(醫藥卜筮)에 이르기까지 연구하시어 세상사람들이 공에 대하여 말하기를 "나라를 경륜하고 세상을 구제할 만한 큰 인재다" 라고 칭찬이 자자 하였다. 위와 같은 세평(世評)은 적중되었다.
공께서 송조(宋朝)의 신종대(神宗代)에 병부상서직(兵部尙書職)에 재임하실 당시 집현전(集賢殿)에서 대악(大樂)을 의논하여 정할 때 왕이 환관(宦官)까지 의논에 참관(參觀)하게 하자 공은 이에 부당함을 간청하여 참관을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공어사(孔御史)는 공(公)과 함께 간(諫)하다가 어사직을 파직당하기까지 하였다. 이에 공은 왕에게 극간(極諫)하기를 "궁중(宮中)에서 상명(上命)을 맡은 관서(官署)에 환관이 바른 직언을 배제하는 까닭은 폐하(陛下)의 선명하심을 보이지 않도록 가리어 숨기고 천하(天下)사람들의 입을 다물게 하려는 것입니다." 라고 하자 간신(奸臣)들은 서로 작당(作黨)하여 공에 바른 직언을 묵살시키고자 "왕의 커다란 선정(善政)에 비하면 마치 옥에 티와 같은 것을 침소봉대(針小棒大)하여 간(諫)하는 것이다" 라고 공을 모함하여 왕의 총명을 흐리게 하였던 것이다.
또한 당시 송조(宋朝)의 영상 왕안석(領相 王安石)이 청묘취식법(靑苗取息法)이라는 기괴한 악법을 제정하여 이법이 백성을 가혹하게 착취하는 악법(惡法)임을 지적하고 이법 시행의 부당성과 법의 폐지를 극간(極諫)하시다가 간신들의 모함으로 인하여 또다시 실패하셨던 것이다.
왕안석이 제정한 청묘취식법이란 당시 백성들간에 고리(高利)가 성행되어 이를 막기위해 나라에서 년이분(年二分)의 이자로 빌려주고 추수기(秋收期)에는 그 원리(元利)를 반환케 하던 법이며 또한 국고가 비어 국고를 채우기 위하여 논과 밭에 푸른싹을 보고 추수도 하기전에 미리 세금을 부과하던 법으로써 이법은 백성을 위한 법이라는 명분뿐이고 실제로는 송조(宋朝)가 부패(腐敗)한 나머지 백성들을 가혹하게 착취하는 악법이었기에 공은 이법의 폐지를 극간하시다가 간신들의 모함을 입으시고 "진실한 직언을 용납지 않는 이땅에서는 더 머물수 없다." 하고 평소 뜻을 같이하던 동지칠학사(同志七學士) 임팔급(林八及), 설인검(薛仁儉), 허동, 송규(宋奎), 최항(崔沆), 권지기(權之奇), 공덕수(孔德狩)와 더불어 표연(飄然)히 배 를 타고 절역(絶域)의 바다를 건너 동쪽나라인 우리나라에 서기 1082년인 고려 문종(高麗 文宗) 36년 8월에 경북(慶北) 영일군(迎日郡) 기계면(杞溪面)에 오셨다.
당시 공의 춘추(春秋) 32세이셨으며 이분이 바로 우리나라 劉氏의 도시조(都始祖)이시다. (소위팔학사(八學士)라고 한다.)
도시조께서는 우리나라에 오시어 40여년 동안 지으신 시(詩)가 수백수 이었으나 아깝게도 많이 유실(遺失)되고 지금 134수가 보존되어 있는바 그중에 몇수를 소개하면 "이내몸 한번 고려에 온뒤로 어찌하여 고국수심 잊어버리랴, 그리운 우리 임금 언제 보았던고 보고파 쏟는 눈물 금할수 없어라."
自東來後 那忘故國愁(자동래후 나망고국수) 美人長不見 難禁涕橫流(미인장불견 난금체횡류) 라고 읊으셨고 또한 추송태기(愁送台記)와 시에 가로되 "쓸쓸한 가을날 수송대에 올라서 내시름 멀리 고국으로 보내노라, 그러나 어느곳이 중국땅인지 사람들은 아쉬움을 몰라주노라." 라고 하셨으며 또 자경시(自警時)가 있으니 "도덕을 지키면 가난도 좋고 글월을 대하니 세속과는 멀어지네 이마음 굳게 잡아 놓이지 않으면 그제야 본성이 돌아오리라." 하셨다. 이 시 삼수(三首)만 보아도 공의 학문이 어느 경지에 이르렀으며 왕에 대한 충성하는 마음이 어느정도 이었던가를 가히 알수 있을 것이다.
공께서는 정학(正學)을 창도(倡導)하는 것을 자신의 책무(責務)로 여기시고 글방을 만들어 예악(禮樂)을 진흥시키는데 최선을 다하심으로써 조정(朝庭)은 물론 많은 백성들이 공을 존경하여 공으로부터 학업을 익히는 자가 수천명에 달하였다.
고려 문종(1019~1083)께서 수차 측근(側近)을 보내어 벼슬길에 나오시도록 권유하였으나 가난함에 만족하시고 오직 유도(儒道)를 정도(正道)로 삼아 사람들을 교화(敎化)시키는데 전심전력(全心全力)을 다하시어 이단(異端)을 배척하고 정학(正學)인 유도(儒道)를 밝힘으로써 삼한시대(三韓時代)의 사도(邪道)와 구악습(舊惡習)이 일소되어 온나라가 태평성대(太平聖代)로 순화(醇化)됨으로써 조정(朝庭)에서는 "하늘이 공과 같은 철인(哲人)을 중국에 태어나시게 하여 공으로 하여금 선도(善導)를 우리나라에 펴서 구습(舊習)을 씻어내고 태평성대를 이루게 한 것이다." 라고 하시며 그 공을 높이 찬양하였다.
공은 서기 1122년 2월 7일에 수(壽) 72세로 서거하시었으며 공의 부인 역시 서기 1123년 6월 7일에 향년(享年) 45세에 서거하셨다. 고려 예종왕(1079~1122)께서는 예관(禮官)을 보내어 후장(厚葬)케 하셨으니 공의 묘는 거타군 북명천면 덕곡산하 계량동, 즉 지금의 경북 영천시(永川市) 녹전동(祿田洞) 비석촌(碑石村)에 양위(兩位)분을 상하봉(上下封)으로 모셨다.
공께서는 세분의 아드님을 두셨으니, 장자(長子)에 堅規(견규: 거창,강릉분관)이시고 고려에서 봉익대부도첨의찬성사(奉翊大夫 都僉議贊成事)정승으로 거타군(居陀君)에 봉작(封爵)되시고 차자(次子)에 휘 堅矩(견구: 아림파)는 고려조에서 광정대부밀직사 대사헌을 역임하셨으며 삼자(三子) 휘 堅益(견익: 백천파)은 봉익대부 이조판서 대사헌이셨다.
충렬왕(忠烈王)때에 한림학사(翰林學士) (설장수), 대제학(大提學) 朴宣忠(박선충), 朴尙衷(박상충), 대사성(大司成) 李文靖(이문정)등 재신(宰臣)들이 상소(上疏)하기를 文襄公 (문양유전)은 동방에 도학(道學)을 창도(倡導)한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조종(祖宗)으로써 그 훈덕(勳德)이 옛날 주공(周公), 소공(召公)과 태공(太公)에 비할만한 분이니 사당(祠堂)을 지어 봉향(奉享)함이 마땅하다고 하여, 이에 왕은 즉각 특명으로 공의 시호(諡號)를 文襄(문양)이라 하시고 예관(禮官)을보내어 위령제를 지내고 개성부(開城府)에 사당을 건립하여 영령(英靈)을 안주케 하셨으며 숭의전(崇義殿)에 배향(配享)하여 나라와 더불어 영원히 함께 빛나게 하였고 전답(田畓)과 노복(奴僕)을 하사(下賜)하시어 생전에 공덕(功德)을 크게 보답하는 은전(恩典)을 베풀었다. (자료출처 : 강릉유씨 홈페이지)
석물(石物)로는 신도비(神道碑), 토지수조세(土地收租稅) 4萬 5里,위토전(位土田)이 오백두락(五百斗落: 약 10만평), 율목(栗木:밤나무) 300주, 대추목(대추나무) 200주가 하사되었고 제실(齊室) 이름은 수송대(水松坮), 정침오간(正寢五間), 동행랑(東行廊), 서행랑(西行廊)이 각각 삼면(三面)과 하마비, 제실(下馬碑 齊室)이 있었다.
이를 관리하는 사람은 정대옥(鄭大玉)이었다. 대현묘(大賢墓:문양공 묘소)를 잘 관리하여야 할 정대옥은 오히려 우리 유씨(劉氏)의 자손이 점점 약해지는 기회를 틈타 유씨제실(劉氏齊室)에 침주하여 산림을 울창하게 하여 사파전토(왕이하사한 밭과 토지)를 자기소유로 만들고 묘표석(墓表石)과 신도비(神道碑), 기타 묘전석물(墓前石物)등을 암암리에 모두 빼다가 암매(暗埋)해버렸다.
그리하여 정대옥은 대대부호로 살아왔다. 지금 상서공(尙書公) 묘단하(墓段下)에 있는 고총(古塚:봉분)은 정대옥의 외손자인 이주관(李周寬)이 파장(把葬)한 묘(墓)이며, 근래에는 더욱 불량하고 나쁜 정모(鄭某)라는 자가 석물을 빼서 주춧돌, 다듬이돌, 제방수문돌 등로 악용하고 전해오던 제실은 뜯어다 몇 해 동안 자신들의 가옥을 개축하는데 이용하는 등 악행을 일삼다가 정가수십가(鄭家數十家眷)들이 몰사하였다. 정총이위(鄭塚二位:정씨묘 2기)는 굴거(掘去:옮김)하였으나 일위(一位:묘 1기)는 기소중(起訴中)인데 이 묘는 임진왜란때 전몰장병의 초혼장(招魂葬)이라고 한다.
도시조 竹諫先生(죽간선생)의 시
自警(자경) : 스스로 깨우침
求道貧猶樂(구도빈유락) : 도덕을 지키면 가난해도 좋고
看書俗與疎(간서속여소) : 글월을 대하면 세상과는 멀어지네
此心操不舍(차심조불사) : 이마음 굳게 잡아 놓이지 않으면
然後復其初(연후복기초) : 그제야 본성이 돌아오리라.
詠雪中松(영설중송) : 눈가운데 소나무를 읊음
蒼蒼冬獨秀(창창동독수) : 겨울에도 푸릇 푸릇 우거진 너에게
霜雪莫能侵(상설막능침) : 눈보라도 지조만은 꺽지 못하네
非但材成棟(비단재성동) : 자라서 큰재목 되기도 하려니와
最憐不變心(최연불변심) : 보다도 사랑스러은 것은 변치 않는 맘
Trackback
Trackback Address :: http://sunki.net/blog/trackback/190

Comments